오해라는 이름의 사랑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by 하난

아스라한 달빛에 의존한 세상. 그 아래 펼쳐진 광활한 바다 위, 나는 한 점이 되어 부유한다. 몸을 감싸 받친 물결이 조금씩, 조금씩 뺨을 적신다. 하늘을 바라본 채 누운 탓에 호흡에는 무리가 없는 데도 이상하게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폐가 눌리고, 가쁘게 긴 숨을 내뱉는다.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또 어느 때보다 안락하다. 세상과 단절된 채 점차 물길에 녹아든다. 어쩐지, 벗어나고 싶지 않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내게 그런 소설이었다. 처음과 주요 장면이 눈이 수북히 쌓인 배경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내게는 그랬다. 이야기에 녹아들면 꼭 물결 아래 몸을 맡긴 채 유유히 떠도는 한 척의 배가 된 것만 같았다. 끝없이 출렁이고, 한없이 차분해지는 순간. 세상과 멀어졌음에도, 아니 그래서인지 온전히 '나'라는 세상에 머무는 순간. 때문에 책을 덮고 나서도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젖어있을 뿐이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시시한 이야기이다. 한 소년의 삶은 기구했고,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한 여자를 사랑했고, 한 남자와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즐거웠고, 불행했다.

소설은 그런 시시함을, 간소하고 문학적인 문체와 잔잔하지만 긴장감을 야기하는 분위기, 삶의 시시함과 현실의 부존재, 자본주의 사회의 흐름과 미추의 기준, 사랑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유가 깃든 메세지를 통해 생동하게 한다. 단언컨대, 이토록 잔잔한데 몰입감 있는 작품을, 나는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이야기는 많은 걸 전하지만 그중 '미추'와 '사랑'에 대해 논해보고 싶다.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계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31 -

나는 관상을 믿는다. 아니, 정확히는 외모에 따른 사회의 차별을 믿는다. 미추는 주관적 기준에 불과하다는 이상주의적인 발언에서 잠시 멀어져 볼 때, 우리 사회에 '못생김'과 '아름다움'은 분명 실존한다. 그리고 보잘것없는 인간은 시시하기 그지 없는 외관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예쁜 아이와 못난 아이에 대한 대우는 어릴 적부터 다르고 자연스레 그들의 성격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어진다. 이러한 성격은 다시 사회의 차별적 대우를 야기한다.-심지어 이때에는 '정당한' 차별이 되어버린다. 사회적 고립 혹은 추앙을 받는 이들의 표정은 서로 다르게 고정되고, 그것은 주름이라는 '인상' 혹은 '관상'으로 자리잡는다. 사람의 얼굴이 그의 생을 지배하는 과정이다.

이상형이 뭐예요, 라는 질문에 외모는 안 보고 티키타카가 잘 되면 좋겠어요,라는 답이 일상적이어진 지금도 여전히 외모지상주의는 횡행하다. 도리어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아닌 척'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적인 미의 기준과 동떨어진 이들은 고단해진다. '아무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데, 자신은 차별'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중 못생긴 여자인 '그녀'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다들 장애인처럼 취급하면서, 장애인으로 인정해주지는 않는다고, 그녀는 말한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추고,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 사람들은 미를 추구한다. 그게 나쁜 것도 아니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별을 온전히 없앨 수도 없다. 그렇지만, 못생긴 이들이 받는 차별은 분명, 나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외관마저 시시해지게 하면 된다고 한다. 무수히 많은 다른 것들을 보면서 외관도 시시해지면,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된다고.

이에 동의하면서도 그전에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우선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못생긴 것 보다는 예쁜 걸 좋아한다고. 못생긴 이들이 차별받는다는 걸. 그리고 알아야한다. 외관이 못났을지언정 각기 다른 개성을 보유한 그들의 성격, 목소리, 재치, 말재주, 그림 실력, 다정함 따위가 분명, 나 자신의 우물을 보다 아름답게 꾸며줄 거라는 걸. 인간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렇게 알아야 한다. 그들이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게 곧 사실이기도 하기에.

이어서,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모든 연애의 90%는 이해가 아닌 오해란 사실을..
(중략)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겐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 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한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017 -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야."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240 -

사랑에 대해 고민할 때, 내가 그를 사랑하는 건지, 내가 상상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 나도 비슷한 고민을 제법 오래, 사실은 근래에도 했다. 내가 애인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게 맞을까. 그저 연애하는 행위에 취해있는 건 아닐까. 내가 상상하는 누군가를 그에게 대입시킨 건 아닐까. 사랑이라 함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런데 지금은 이 소설을 통해, 그리고 몇몇의 경험을 통해 그런 생각을 한다. 상상 좀 하면 어떤가. 우리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삶을 살며, 죽을 때까지도 '나'를 찾지 못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타인인 '그'를 내가 무슨 수로 알겠나. 무슨 방도로 '그'를 '그'라 정의하겠는가. 어찌되었든 내가 보는 그는 그의 사소한 일부이고, 나는 죽는 날까지 그를 알지 못할텐데.

그러니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를 그로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 다른 부분을 마주했을 때, 유연하게 그 상상의 부분을 다른 상상으로 바꿔 메우는 것 아닐까. 작중 주인공의 말처럼, 이해라는 이름의 '좋은 오해'를 하는 건 아닐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사실, 조금 당황스럽다. 첫 파트의 대부분이 '...'과 괴상한 비유들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래서 이 책에 더 깊게 빠져들 수 있었던 듯하다. 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의 종착점이 어디일지, 가벼운 마음으로 익사할 수 있었다.

주인공을 사랑한, 주인공이 사랑한 못생긴 '그녀', 염세주의에 빠진 다정한 철학자였던 '요한', 남편을 위해 일평생 헌신한 대가로 남편에 의해 버림받은 '어머니' 등 인물 한 명,한 명을 살펴보는 것도 이 소설의 묘미이다.

말할 것도, 고민할 것도 많은 책이지만 무엇보다,
이 이야기를 느껴보길, 부디 바라본다.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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