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다. 만화책부터 소설책, 인문, 에세이, 시집까지. 세상을 언어로 바꾸어 나간다는 것이 퍽 흥미로웠다. 전혀 본 적 없는, 혹은 봤으나 그저 스치고 지나갔던 일들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때로는 처연하게, 또 때로는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나 소설을 사랑했는데 장편소설을 선호했다. 대개의 장편소설에는 주인공의 삶이 온전히 녹아있다. 그의 생각, 감정, 그가 미워한 사람, 사랑한 이들, 그의 꿈과 절망이 모두 녹아있다. 그게 참 좋았다. 사실은 얼굴조차 본 적 없는 누군가와 호흡을 맞춰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문장 하나하나에 그의 감정이 담겼고, 빈 여백마다 그의 숨결이 있었다.
소설가를 꿈꾸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책에서 얻었던 위안, 감동, 그것들이 이어준 또 다른 인연까지. 그 황홀한 일련의 과정을 내 손으로, 누군가가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책을 통해 얻었던 감동과 슬픔이 머리끝까지 차올랐을 때, 처음으로 키보드 앞에 앉았다. 흔히 2차 창작이라 불리는 소설, 혹은 만화의 뒷이야기를 상상해 적었던 것이 처음이었다. 좋아하던 작품을 캐릭터성을 살려 그들이 다른 세상에 존재했다면, 혹은 그들이 이러한 사건을 겪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 달라졌을까를 적어나갔다. 그건 꽤, 짜릿한 경험이었다. 가슴 뛰게 한 이야기를 내가 이어나가는 것만 같은, 그들의 세상과 내 손끝이 이어져있는 것만 같은 감각. 키보드 앞에서 나는, 그들의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서서는 내 글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내 글을 보여주며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마침 새로 만들어진 글쓰기 동아리가 눈에 들어온 것은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글쓰기 동아리 멤버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해당 담당 선생님께 찾아갔다. 생각보다 요즘 아이들은 글쓰기에 관심이 없었던 듯, 전교생을 대상으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원부족으로 쉬이 동아리에 가입할 수 있었다.
동아리는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나를 포함한 1학년 2명, 2학년 5명이 전부였다. 우리는 2주마다 동아리실에 모여 지난 2주간 쓴 글을 나누었다. 소설을 쓰는 사람도, 시를 쓰는 사람도, 에세이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꼭 조선시대를 살다 온 것 마냥 고풍스러운 문체를 지닌 사람도 있었고, 주말에 경험한 흥미로운 사건을 서술한 사람도 있었다. 지나치며 우연히 본 관경을 푸르게 표현하는 이도 있었고, 과학적 사실을 인간사회에 빗대는 선배도 있었다.
늘 기성작가들이 쓰는 글만을 보던 내게 그건 가히 충격적이었다. 조금 더 직설적이고 단순한 문장들은 여느 작품들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이렇게 예쁜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 놀란 적도 많다. 전문 선생님은 우리들이 하는 얘기에 경청하며 맞춤법, 문단 띄우기 등 객관적으로 규율된 규칙을 어겼을 때만 수정하라고 할 뿐 어느 것에도 개입하지 않았다. 학교에서 가장 연세가 많으셨음에도 우리가 또래인 듯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신기한 생각이다, ''이러한 부분이 참 좋다' 등 늘 함께 배워나가고자 하셨다.
동아리실은 내게 새로운 세상이었다. 교실부터 급식실, 음악실, 복도까지 모두 모토논의 일상이었다면, 동아리실은 푸르고, 노란, 때로는 붉고 하얀 세상이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토록 다른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 퍽 흥미롭고 즐거웠다.
성인이 된 후로도 그 경험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늘 무언가를 쓰고 공유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런 모임을 알아보거나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시간적인 제약으로 인해 그만둔 지금도 늘 마음 한켠에는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브런치에 작가신청을 하게 된 것도 그것의 일환이었다. 흘러넘치는 생각을 글로 담고 싶다는 열망,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바람이 날 이곳으로 이끌었다.
나는 나와 생각이 다른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에게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
SNS에서 우연히 이 글을 본 후로 내 모토는 줄곧 이것이었다. 그래서일까, 글쓰기는 늘 즐거웠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들, 나와 견해를 같이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나를 위한 글이었기에 그저 즐거웠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글쓰기는 내게 부담이 되었다. 정제된 글, 누가 보아도 잘 썼다고 할 법한 글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날 짓눌렀다. 한 번 부담을 가지자 펜을 들 수가 없었다. 시작부터 어려웠고 쓰고 나서도 영 못마땅했다.
우스운 일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한 작가님이었다고. 몇몇 사람들이 칭찬해 줬다고 기고만장해진 것이다. 얼마 전 영어공부를 하느라 우연히 30일 챌린지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해당 영상의 화자는 컴퓨터 공학을 하는 사람으로,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30일 동안 사소한 습관을 형성해 나가기로 한다. 그중 하나가 하루에 1,600여 글자를 쓰는 것이었다. 그는 30일 동안 5000자에 달하는 소설을 썼는데, 작품은 끔찍했다. 고작 한 달 만에 그러한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 쓴 글이다 보니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화자는 청중들에게 말한다. "누군가 내게 직업을 물어본다면, 그때 나는 소설가라고 답할 수 있다."라고.
미지근한 물 안으로 얼굴을 넣은 기분이었다.
사실 나는 그리 똑똑하지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단 하나 누구에게든 자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 꾸준함과 성실함이 내게는 그 무엇보다 큰 자부심이자 재능이었다.
꾸준함 덕에 얻은 약간의 성과가, 그로 받은 몇몇의 찬사가 너무도 쉬이 날 오만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뭐, 이제라도 다시 깨우쳤으니 다시 해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