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면 어쩌라고요.
나는 일기 쓰기를 그만뒀다.
작년 1월부터 써오던 일기를 멈췄다. 다른 것 아무것도 안 해도 일기만은 꼭 써야지, 하며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써 온 일기. 1년째가 되어 빼곡히 찬 다이어리를 떠나보낼 때, 두툼한 그 책 한 권이 내 지난날을 긍정하는 것만 같아 기뻤다.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자랑할 일이 생기면 주섬주섬 다이어리를 꾸미며 수줍게 웃었다. 어느샌가 이 사소한 습관은 나의 자신감이 되었다.
그래서 더 고민했다. 한 번 그만두게 되면, 다시 시작하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 되리라는 것을 알기에. 이것마저 멈춰버리면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만 같은 불안감에 망설였다.
오랜 망설임 끝에 멈추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순하다.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힘듦은 여느 사람들의 생각과는 궤를 달리했다. 매일 쓰는 것,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도 기록을 남기는 것, 때때로 따분하고 귀찮게 느껴졌지만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감당할 수 없는 우울에 잡아먹힌다. 친구와의 사소한 다툼으로, 제대로 풀리지 않은 업무로, 저의 부족함으로. 그런 명확한 이유로 인해서일 때도 있고, 나조차 인식할 수 없는 이유로 어느 순간 그런 감각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 그것은 나의 예민함과 과도한 자기반성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잊고자 했다. 끝없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은 질리도록 해보았고, 그것이 대개 질 낮은 자기혐오로 빠진다는 걸 깨달은 이후로는 큰 잘못이 아닌 한 그저 잊고 환기시키려 노력했다. 그건 꽤 효과적이었다. 다소 기분이 처지긴 해도 다른 자극으로 쉽게 기분을 전환시킬 수 있었고, 되레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겨우 성공해 낸 전환을 일기는 원래 상태로 돌려놓았다. 어쩔 수 없기 하루를 복기해야 했고, 그것은 단순한 기억의 복기뿐 아니라 감정마저 복기시켜 버렸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밤을 보내게 되면 다음 날 더욱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했던가. 그런 날이면 그날 밤은 물론 다음 날마저 꿀꿀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그 무엇도 나의 건강보다 우선될 수 없음을 알기에. 동시에, 이 사소한 습관만이 나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길 바라는 바람으로.
일기 쓰기를 그만둔 지 일주일째. 글 없는 밤에 샤워를 하는데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학교생활에 버거움을 느끼는 아이를 선생님이 지도하는 내용에 대한 소설이었는데, 아이는 단순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해 정신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아이의 부모가 어떠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데 가정폭력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부모가 서툰 부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튼, 그들도 아이의 위태로움을 느꼈으나 단순한 사춘기로 믿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날들을 지속하던 중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놀랍게도 그 일기에는 아이의 우울감과 자살충동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충격받은 그녀는 선생님과 상담을 하게 되는데 아이의 일기장을 본 선생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아이가 이제껏 버텨올 수 있었던 건, 글을 적었기 때문이겠네요. 이렇게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적는 게 그런 감정을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용케도 스스로 방법을 찾아 노력해오고 있었네요."
오래전 읽은 글이라 명확한 대사는 생각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당시, 어렸던 내게 이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부정적인 걸 되새기고 적는 게 우울감에 좋을 수가 있지? 되레 그런 감정을 더 부추기진 않을까?
그러나 동시에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이 버거운 감각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릴까 봐, 외레 누군가의 짐만 되어버릴까 봐, 겨우 벌렸던 입을 다무는 순간을. 그리하여 차오른 감정을, 생각을 어디에도 나눌 수가 없었던 날의 슬픔을 안다. 겨우 내뱉을 수 있는 곳이 종이였겠지. 빼곡하게 적어나가며 약간의 숨을 내쉴 수 있었으리라. 어쩌면 한편에는 누군가 이 글을 발견해 줬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 아이의 감정을 이해한 후에는 의문이 들었다. 당시 나는 매일 학교에서 진행하는 감사일기 쓰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루에 몇 가지만이라도 무엇인가에, 누군가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삶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리라는 바람과, 그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선생님의 말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감사일기는 효과적이었다. 꿀꿀한 기분으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다가도, 오늘날 감사할 일이 무엇이 있었지,를 고민하다 보면 웃음이 나곤 했다. 뜬금없이 3월에 내린 눈에 친구들과 운동장을 거닐었고, 모처럼 좋아하는 반찬이 나왔으며, 동아리 선배의 푸른 바다 같은 시를 읽었다. 근래 읽기 시작한 소설의 주인공의 비통함에 함께 아파해보는 경험도 했고, 산책 나온 강아지와 인사할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세상은 어여쁜 것 투성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슬픈 감정을 적는 것과 어여쁜 생각을 적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좋을까?
무엇이든 그러하듯 결국 균형이 중요하리라. 도저히 슬픔을 직시할 수 없는 순간에는 기쁨의 순간을, 슬픔이 차올라 내뱉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리라 느낄 때는 그 감각을 적는 것이 낫겠지.
어쩌면 그 균형을 못 찾아서 일기 쓰기가 버겁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