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시련을 부여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붓다.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자 했던 사람답게 그는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것을 가장 높은 성품으로 보았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에 동의하리라 본다. 우는 사람 곁에서 그와 함께 울어주는 것, 가난에 허덕이는 이웃들의 영상에 눈물 흘리는 것. 그러한 마음을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게 정말 곱기만 한 마음일까?
우리는 상대적 사회에 살고 있다. 대부분의 영역에서 사람들은 줄 새워져 등급이 매겨진다.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실패가 나의 승급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격하게 말해, 누군가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되곤 한다.
사실 누군가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그의 슬픔이 내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되레 이득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나마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학창 시절 시험을 망친 친구를 위로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괜찮아. 열심히 했으면 된 거지. 다음에 더 잘 칠 수 있을 거야."같은 상투적인 위로를 건네며 우리의 마음은 어떠했나? 친구가 걱정된 것은 사실이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고, 슬퍼하거나 낙담하지 않길 바랐다. 얼른 기분이 좋아져 웃어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위안을 얻지 않았던가. 나보다 못한 친구가 있어서, 상대평가에서는 내게 유리할 수밖에 없기에 손쉬운 위로가 입 밖으로 나왔던 것은 아닌가.
물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사실들을 일일이 떠올리며 계산적으로 구는 이는 별로 없다. 허나 분명 마음 한 구석에는 나도 모른, 그러한 생각들이 심어져 있었으리라.
이런 감정이 어떻게 가장 높은 성품이 될 수 있을까. 어쩌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한다는 건, 누군가의 슬픔을 통해 스스로를 드높이는, 저열한 감정이 아닐까.
내게 누군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약간의 슬픔을 담은 글, 영상만으로도 쉬이 울음이 터졌다. 상대의 눈망울이 일렁이는 것만 봐도 따라 울었다. 상대가 괴로워하는 걸 보며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스스로의 무력함에 괴로워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들의 행복을 함께 축복해 주는 건 너무 어려웠다. '나 이번에 합격했어!''자격증 땄어''일하는 곳에서 칭찬받았다?' 해맑게 웃으며 저의 기쁨을 나누고자 하는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꾸며진 웃음뿐이었다.
그들의 행복을 마주할 때면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왜 여기 머물러 있을까. 저들은 힘껏 나아가는 데 나는 홀로 남아버린 듯한 느낌. 저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으로 반평생을 함께 해 온 친구들, 때론 가족의 기쁨마저도 진심을 다해 축복해 줄 수가 없었다.
이런 감정은, 많은 이들이 느끼고 있으리라 믿는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 미국인들의 평균적인 공감능력이 30년 전에 비해 40% 가까이 감소했다는 결과가 나왔다.
누군가의 감정을 온전히 마주하고 이해할 여력이 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이미 너무 지쳐있어서, 저 하나의 마음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버거워서, 타인에게 공감할 힘이 없다.
그로 인해 사회는 점점 분열되어 간다. MZ세대, 여혐, 꼰대와 같은 단어로 정의 내려지는 사람들. 세대갈등과 젠더갈등. 아군 아니면 적이 되는 세상. 구획하고 나누어지는 사회에 가장 필요한 건, 진심 어린 공감이 아닐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어서 상대를 나만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때때로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기적이 펼쳐지는 것은, 그 누군가는 더 이상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범위가 '너'에게까지 가 닿는 것이라고.
'내'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도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너'와 '나'의 교집합이 '세상'이 된다면, 우리는 보다 다정한 세상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깊이 바라보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