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한결씨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귤 Jun 26. 2017

<박열>을 만나다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그리고 한 인간.

영화 <박열>을 통해 박열을, 가네코 후미코를, 그리고 역사의 수많은 조연을 만났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고 자극적인 포스터와는 달리, <박열>은 한 인간의 투쟁을 비교적 잔잔하게 비춘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다른 영화들과 비교했을 때 자극적인 장면은 오히려 덜한 편이고, 불시에 관객들의 웃음보를 터뜨리는 유머러스한 장면도 결코 적지 않다. 그러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숭고한 삶과 죽음은, 그 어떤 적나라한 독립투쟁보다도 마음을 더 강하게 울린다.


<박열>은 일본 정부가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동요하는 국민정서를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를 저지른다는 유언비어로 조선인 대학살을 조장한 끔찍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국민들의 불만을 조선인에게 모두 돌리기 위한 만행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일본 정부는 그럴듯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희생양으로 삼을 조선의 영웅을 찾는다. 그리고 그가 바로 박열(이제훈)이었다. 



박열은 당시 일본에서 항일운동이자 무정부주의 운동을 이끌던 젊은 청년이었다. 그의 시 '개새끼'를 읽고 그에게 한눈에 반한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를 비롯하여 여러 조선, 일본 동지들과 함께 아나키스트 단체 불령사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하늘을 보고 짖는 / 달을 보고 짖는 / 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 / 뜨거운 것이 쏟아져 / 내가 목욕을 할 때 
나도 그의 다리에다 / 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 박열 <개새끼>


안 그래도 일본에게 눈엣가시였던 박열은, 이번 사건을 통해 제거할 최적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박열의 폭탄 반입 시도를 황태자 암살사건으로 몰아, 무조건 사형인 '대역죄'로 그를 재판에 세운다. 일본이 꾸며낸 음모를 통해, 박열은 조선과 국제사회에 진상을 알리고 일본 정부를 규탄할 기회를 만들 큰 그림을 그린다. 



꼭두각시가 필요한 일본의 상황을 이용하여 발칙하고 대담한 '딜'을 하는 박열, 그리고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일본 정부의 모습이 영화 내내 통쾌하게 전개된다. <박열>은 이렇게 독립과 항일운동을 담은 여느 영화들과 다를 바 없이 우리나라 국민의 한(?)을 어느 정도 풀어주다가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실제 발언을 바탕으로 구성한 심문 및 발언 장면을 통해 단순한 항일운동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관객을 이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모인 이들 앞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평등한 사회와 인권에 대한 사고를 차단하는 천황제도를 비판하고, 천황도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고 외친다. 자신의 사형선고장을 연설장으로 만들어낸 이들의 기발한 꾀는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오히려 사형을 기대하고 이용하는 초월적인 용기에서 나온다. 가네코 후미코는 실제로도 사형 선고 판결에 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한다면
그것이 죽음을 향한 길일지라도,
삶의 부정이 아니다. 
긍정이다.


그들이 죽음을 두려워할 거라는 것은 일본의 큰 오산이었다. 일본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련한 무대에서, 간토 대학살 사건의 진상과 일본 제국주의의 민낯을 규탄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짙은 여운을 남기고 퇴장한다. 그 이후 전향 및 북한에서의 활동 등 박열의 삶은 다소 예상을 빗나가긴 하지만, 영화가 담은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 실화라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삶, 그리고 로맨스보다 더 뜨거운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영화였다.




<박열>을 보고, 인간의 두려움의 근원인 '죽음'을 극복한 자에게는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한한 자유와 용기가 허락됨을 깨닫는다. 죽음에 대한 자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미쳤다고 말할 테지만. 항일운동을 다룬 역사물이 이미 적지 않음에도, <박열>은 독립운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죽음과 안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투신할 수 있는 이상과 꿈이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영화였다.



뱀다리


+ 개인적으로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짱짱걸)>이라고 명명하고 싶을 정도로 사실 박열보다 가네코 후미코의 삶이 더 드라마틱하고 인상 깊다. 등장인물 모두 실제 인물임을 영화 초반부터 강조하고, 씬스틸러로서의 역할이 굉장히 기대되는 특색 있는 배우들이 등장함에도 이들의 캐릭터에 주목할 겨를도 없이 너무 초점이 박열에게만 맞춰져 있다는 점은 다소 아쉽다. 


++ 예수가 구원자임을 전파하다가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고 옥에 갇히는 등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자신의 변론 기회를 헤롯 왕과 로마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극 중 박열 및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겹쳐 보인다. 크리스찬이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의 모습을 더욱 인상 깊게 주목해야 할 것 같다.


+++ 굳이 아쉬운 점을 또 하나 꼽자면, 너무 포스터가 자극적이다. 이제훈의 야생적인 표정도 충분히 자극적인데 글씨까지 시뻘개서 영화의 훌륭한 색깔을 가리는 것 같다.




한줄평: 기발하면서도 숭고한 독립운동가이자 이상주의자들의 실제 이야기가 훌륭한 연출과 연기를 통해 멋지게 담긴 신선한 작품!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의 시사회 초대를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진출처: Daum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