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맡겨진 정의를 책임진 용기 있는 이들의 이야기
<분노의 질주> 시리즈보다 긴장감 넘치는 드리프트, <셜록>과 왓슨을 능가하는 뜨거운 브로맨스, <친구>와 쌍벽을 이루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7번 방의 비밀> 뺨치는 딸바보... 이 모든 것을 담은 역대급 영화가 나왔다. 광주 5.18 학살 당시의 역사적 현장을 전 세계에 알린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 <택시운전사>가 개봉한다.
믿고 보는 송강호의 선택작은 이번에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올여름, 소박하지만 대단한 영화 <택시운전사>는 관객들에게 기대 이상의 감동과 웃음을 선사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약간의 스포 주의)
아내를 병으로 잃고 주인집 눈치를 보며 셋방에 사는 만섭(송강호)은 택시운전사다. 비록 월세가 밀리긴 해도 그의 유일한 수입원인 고물택시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 함께 살아가는 그의 삶은 나름 만족스럽다. '공부는 안 하고 데모나 하는 요즘 대학생들'이 나타나기 전까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모래바람을 먹으면서까지 돈을 번 그에게, 데모란 장사를 공치게 하고 애지중지하는 그의 택시를 위협(?)하는 배부른 놈들의 몰상식한 짓인 것이다.
수입이 줄어 한숨만 쉬던 그에게 지금껏 밀린 월세에 육박하는 금액, 10만원을 하루 만에 벌 기회가 찾아온다. 광주의 긴장상태를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일본에서 건너온 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광주를 다녀오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만섭의 사우디 출신 영어실력이 영 마뜩잖지만 한시가 급한 피터는 만섭과의 동행을 시작한다.
꽁꽁 봉쇄되어 있던 광주에 요령껏 진입한 만섭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다. 광주에 들어서서 만난 '영어 잘하는 대학생' 재식(류준열)의 도움을 받으며 피터는 현장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얼떨결에 군부의 무력진압과 시민투쟁의 중심지에 들어선 만섭은 그제야 점점 상황을 파악하고 갈등을 느끼지만, 부상자를 나르는 전남택시의 리더급인 태술(유해진)을 비롯한 광주 시민들이 서로 힘을 합쳐 난관을 맞서고 있는 것을 외면하기가 어렵다.
결국 만섭과 피터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고 광주의 실상이 전세계에 드러난다는 것을 역사가 말해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만섭과 피터, 그리고 태술과 재식으로 대표되는 광주 시민들의 이야기를 영화는 소시민의 눈으로 탁월하게 그려낸다.
더 말해 무엇하랴만, 나름의 관람포인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1. 내적갈등과 감정변화를 탁월하게 전달하는 송강호의 연기
만섭은 그에게 그토록 친절했던 광주시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탄압당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한다. 그리고 이를 알리지 않으면 그저 하나의 폭동으로 남을 것임을 알게 된다. 며칠 전만 해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그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렸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게는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과 그보다도 중요한 딸이 있다.
단순하고 만족스러운 삶만을 살아온 만섭에게 이 갈등은 너무나 버겁다. 만섭 역의 송강호는 이를 너무나도 리얼하게 연기해내는 바람에 내가 다 가슴이 탈 정도이다. 결국 만섭은 행여 먼지라도 앉을까 매일 덮개를 씌우며 애지중지하던 그의 재산 1호 고물택시를 총구 앞으로 내몬다. 그리고 '기자는 이걸 찍는 것이, 그리고 기사는 손님을 태우는 것이 해야 할 일'이라는 만섭의 다짐에 피터도 더욱 힘을 얻어 현장을 기록하고 결국 광주의 역사를 바꿔낸다.
정의에 눈뜨고, 주어진 정의의 과제를 책임지기까지 만섭의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갈등과 감정변화를 눈여겨본다면 '소시민은 어떻게 정의에 눈뜨는가, 그리고 결코 가볍지 않은 희생 앞에서 정의를 책임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그리고 이 영화가 더욱 길게 가슴에 남을 것이다.
2. 색감과 정감이 살아있는 1980년 광주
비극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함에도 따스한 색과 정이 관객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이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뿐만 아니라 새싹처럼 파릇한 택시/병아리처럼 노란 기사복, 우리 할머니집 같은 전라도 가정집의 밥상,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싱그러운 웃음을 띤 광주 대학생들의 얼굴이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과 균형을 맞추며 영화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숨을 멎게 하는 긴장감 속에서, 웃음을 주는 장면도 적지 않다. 비극적인 장면 앞에서도 눈물이 나지만 정이 넘치는 전라도의 클라스에 코 끝이 찡하기도 하다. 1980년 광주를 이렇게 생생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재현해낸 것만으로도 이 영화에 별점을 마구 쏟아주고 싶다.
3.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역사적 사실
영화를 현실보다 더 리얼하게 연기해낸 믿고 보는 배우들에게 먼저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현실을 영화보다 더 극적으로 만들어낸 역사 속 인물들에게는 경의를 표한다. 주먹밥을 나눠먹고 택시로 부상자를 실어 나르며 그 택시에 기름을 값없이 채워준 광주 시민들, 목숨을 걸고 취재한 피터와 목숨을 걸고 운전한 만섭.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기억에 1980년의 광주는 폭도들이 까닭 없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곳으로만 남았을 것이라니, 생각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아무튼, 영화 속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더욱 생생히 경험하고 싶다면 역사를 미리 공부해가는 것도 추천한다.
한줄평: 1980년 광주를 다시 한번 잊지 못하게 만들 훌륭한 영화!
*이 글은 브런치 무비패스의 시사회 초대를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진출처: Daum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