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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노 Dec 06. 2021

통장에 남은 돈 단 27만원

1년의 백수 생활, 경제적 데드라인


통장 잔고에 27만1천1백68원이 찍혔다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마션』의 첫 세 문장이 완벽한 나의 심경을 대변하고 있다. 이렇게 간결하고 완벽하게 나의 상황을 표현해주는 탁월함이 놀라울 지경이다. 계좌에 마지막 입금 내역으로부터 약 1년, 그 끝에 남은 것은 27만원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지? 무엇이 문제였을까? 글 좀 써보겠다고 원서를 모조리 문예창작학과에 넣었다가 다 떨어지고 결국 국문과에 입학한 거? 동기들이 경영학과 복수 전공할 때, 혼자서 영상 전공한 것? 남들이 인턴 원서 넣고 있을 때, 전국 곳곳 영화제 스태프로 활동한 것? 수많은 이유들이 떠오르지만, 이 순간 제일 후회되는 것은 취업 준비하겠다고 들어오는 영화제 근무 제의를 전부 거절한 것이다. 돈 벌 수 있을 때 벌걸.



다른 무언가를 꿈꿨다


 영화제 스태프는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계속해서 영화제 일을 하고 있는 선배들을 보며 이런 삶도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하고 2년 만에 다시 영화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태프는 대부분 단기 계약직이다. 짧으면 1주일, 길면 육개월 정도 근무 기간으로 계약한다. 근속연수라는 개념이 없는 일이다. 아무리 길어봤자 2년 이상 같은 영화제에서 일하기 어렵다. 매년 다른 사람이 일하다 보니 노하우 축적이 없고, 발전도 없었다.


 나는 성장하고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한 달짜리 계약직에 불과했다. 나의 업무는 누군가가 작년에 만들어둔 일을 올해 똑같이 반복하는 일이었다. 작년에 나의 자리에서 일했던 그 누군가도 그랬고 재작년의 누군가도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의 상상을 실행하는 일도 좋지만, 이제는 나의 상상을 펼쳐보고 싶었지만, 단기 계약직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제 선배 중에 취업 준비를 하다가도 다시 영화제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자주 봤다. 취업이 어렵기도 하고, 단기로 일하고 목돈 벌기 좋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이 유혹에 빠질까 무서웠다. 그래서 나는 올해 3차례 들어온 영화제 근무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경제적 데드라인


 그렇게 마지막 영화제 근무로부터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공부하고, 상담과 코칭도 받아보고 부트캠프와 직무 체험 프로그램도 수료했다. 처음에는 모두 탈락하던 서류 전형도 하나둘 합격하기 시작하고, 면접도 봤다. 계속 부딪히고 탈락하기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나의 목소리를 내면서 일하고 싶다는 다짐도 무뎌지기도 했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백수 생활에 적응해갈 때쯤, 경제적인 데드라인이 발생했다. 경제적 데드라인이라니! 난생처음 들어봤다. 당연하지, 내가 방금 만들어 냈으니까. 분명 시간은 아니지만 한정된 자원 내에서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단어가 아닌가 싶다. 27만원이라는 경제적 데드라인 안에 나는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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