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의 편지 4화: 자존감

by 호원장

델스존은 정자의 기둥에 힘없이 기대어 섰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그는 자신의 몸이 여전히 이곳에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 단순한 사실이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며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증폭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실망이었다. 그녀가 약속을 어겼다는 것에 대한 유치한 서운함. 그러나 그것은 곧 분노로 변했고, 다시 불안과 광기가 뒤섞였다.

혹시 그녀가 너무 일찍 왔다가 가버린 것은 아닐까?

그는 난간을 움켜쥐고 정자의 마룻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혹시라도 그녀의 발자국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조그만 단서라도 남아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마룻바닥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안개는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스스로를 진정시켜야 했다. 아니, 그는 애초부터 진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머릿속은 점점 더 복잡해졌고, 생각들은 서로를 잠식하며 끊임없이 뱅뱅 돌았다.

그녀는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손가락을 깨물며 골똘히 생각했다. 혹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장난이었던 것일까? ‘꼭 뵙고 싶어요.’라고 썼던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 말은 진실일까? 아니면, 단순한 사교적인 인사였던 것일까?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 편지를 읽으며 미소를 지었을까? 비웃었을까? 혹은, 그녀의 주위 귀족들과 함께 농담거리로 삼았을 수도 있다. “저 불쌍한 음악가는 나를 위해 포도원에서 기다린대요.” 하고.

그의 숨이 가빠졌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그는 벤치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아니야. 그녀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그러나 그 확신조차 그의 의심을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자의 난간을 짚었다. 불안정한 걸음으로 포도밭 사이를 서성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의 재능이 부족한 것일까? 그녀가 만약 나를 무시하고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난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음악 때문일까?

그는 두 눈을 감고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만약 그의 음악을 들었다면, 그녀는 무엇을 느꼈을까? 감동했을까? 아니면, 재능이 없다고 느끼고 지루해했을까?

그는 갑자기 자신의 음악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만약 그녀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감정이 담긴 곡조들은 단지 공허한 음들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의 음악은 그녀에게 단 한순간의 울림도 주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음악가로서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갑자기 손가락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음악이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면, 그는 연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의 손은 이제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그것조차도 불안정하게 떨렸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끔찍한 결론이 내려졌다. 그녀가 오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그가 하찮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초라한 옷, 허름한 집, 곰팡이가 핀 벽지, 부서진 촛대. 그는 자신의 집 안을 떠올렸다. 어둡고 눅눅한 방, 삐걱거리는 의자, 낡고 해진 악보들. 귀족들은 조롱하듯 웃을 것이다. “그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야.”

그의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들에게 비웃음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인가?

그는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만약 그녀가, 그리고 그녀의 귀족 친구들이 그를 조롱했다면?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포도밭을 지나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직접 그녀에게 확인해야 했다. 직접 그녀의 입에서 답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저택에 다다르자, 커다란 대문 앞에서 하인들이 그의 길을 막아섰다.

누구시죠 물러서세요”

델스존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하인들을 노려보았다. “나는 스칼렛 양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께 직접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받은 소리가 없는데요 스칼렛 양께서는 손님을 맞이할 예정이 없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그는 안 되겠다는 듯이 뛰어들듯 몸을 던졌다 필사적으로 문을 붙잡고 하인을 밀어붙였다. “전 꼭 확인해야 할 게 있다고요"

그러나 하인들은 델스존에 비하면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들은 섬세하고 병든 예술가쯤은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저지할 정도의 완력이 있었다. 델스존은 한 차례 저항하다가, 손목이 완전히 제압당하자 힘이 빠진 듯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를 둘러싼 귀족 저택의 차가운 벽이 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빛이 흐려졌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하인에게 다가가 멱살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하인이 달려와 그의 팔을 붙잡고 강하게 밀쳐냈다. 델스존은 비틀거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만하십시오, 제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이 광경을 목격하고 수군거렸다. 귀족들이라 보이던 몇몇 남자들은 손가락질하며 델스존을 조롱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그들의 시선 따위는 이젠 의미가 없었다. 압도적인 장벽에 가로막혀 어떤 의문도 제기할 수 없다는 현실이 무력감을 줄 뿐이었다. 이 초라한 존재는 무엇인가. 델스존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된 채로 창백한 얼굴로 하얗게 질려서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 모습에선 기괴함까지 느껴졌다. 스칼렛이 보지 않는 곳에서, 그는 세상의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집채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한 발짝 물러섰다. 그의 옷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다리는 부르르 떨렸다.

그는 한 동안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무겁고 어두웠다.

그녀는 그를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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