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일기

by 호원장

일기를 쓴 지 얼마나 됐을까.
어쩌면 10년은 훌쩍 흘렀을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반성의 의미도 있겠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은 나이에 지나간 세월에 집착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애써 그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결국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나를 보며 그저 덤덤하게 흐르는 시간을 느낄 뿐이었다.



며칠 전, 청담동 빌딩 공사 건으로 서영 씨와 함께 일하게 됐다. 그녀는 이 동네에서 발이 넓은 중개인으로, 세련된 미모와 능숙한 말솜씨로 사업 중개에 수완이 뛰어났다. 이번 건도 상대방이 까다로워서, 직접 나서는 것보다 그녀가 중재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마침 서영 씨 아들이 건축 디자인 공모에서 상을 받았다고 해서, 축하도 할 겸 영일군과 함께 호텔 뷔페에서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영일군은 스물두 살.
밝은 미소와 조리 있는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대화를 나눠보니, 사리분별이 빠르고 정확했다. 가끔 경솔한 면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젊음의 싱그러움처럼 느껴졌다.
문득문득, 또래인 아들 기수가 떠올라 어쩔 수 없이 비교하게 되었다.
기수도 한때는 믿음직스러웠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뭐든 혼자 해결하려 애썼고,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곤 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그 아이는 그저 실패를 거듭하는듯하다.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방황하는 기수를 보면서 문득, 나도 10대에 어머니를 잃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냈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실 나는 기수에게 그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사업적으로 도움을 주려고 물심양면으로 노력도 많이 했지만 하지만 어쩐지, 내 공허함이 녀석에게 공유되는듯하고 때론 나보다 더 깊이 가라앉고 있는 듯하다.
아들의 어두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북돋아 주고 싶지만, 이젠 입을 열려하면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이다.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도 이내 뻔한 잔소리 같아져서 입을 다물고 마는 것이다. 결국은, 우리 둘 사이엔 침묵만이 남았다.


그 침묵은 언제나 식탁 위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 일주일 전쯤인가 오래간만에 얼굴을 봐서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식사자리에 깔린 무거운 안개를 치울 도리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만 했을까.. 국 한 그릇이 비어가는데도 숟가락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입을 떼려다, 매번 목구멍이 돌처럼 굳었다. 돌은 가슴으로 내려앉았고, 숨이 막혔다. 기수는 고개를 숙인 채 밥알을 몇 개 건드리다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때 그릇에 부딪히는 금속성 소리가 방 안에 길게 울렸다.


기수에게 말하고 싶었다. 이제라도 기수에게 힘이 될 뭔가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오직 냉장고의 웅웅 거림과 가벼운 한숨만이, 허무를 증언하듯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싶었으나, 그 마저 거부당할까 두려워 움츠린 채 무릎 위로 다시 내려놓았다.

우린 그렇게 나란히 무덤처럼 앉아있었고 사이의 침묵은, 결코 건너가지 못할 심연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영일군과의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이 자리는 서영 씨가 일을 시작하는 아들이 경험 많은 업계 선배에게 뭐라도 조언을 듣게 하겠다는 가벼운 청탁의 의미와 함께, 겸사겸사 마련한 것이다. 내가 대단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 배경 없이 시작하는 젊은이에겐 때 묻은 조언이라도 도움이 될 때가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라. 사실은 경험이 아무리 쌓여도 기술 사회가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보니 누군가 위에 서서 모든 걸 다 경험한 듯 젊은이에게 길을 제시하는 것에 대해선 상당히 조심스러운 편이다. 게다가 조언 같은 건 성격상으로도 맞지 않아 평소엔 그런 자리자체가 어색하고 불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엔 왠지 기수와 또래란 것이 생각나서인지. 가슴에 쌓인 걸린 돌덩어리가 무거웠던 건지 대화에서 염치없게도 회복되는 기분까지 들었다. 속이 편안한 식사자리였던 것이다.



대화 중에는 약간 묘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향수였던 거 같은데, 그날 식사자리 후에 남은 깊은 여운은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영일군과의 식사자리에서 젊은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과거의 나를 떠올렸던 것이다. 거칠어진 손톱 주변, 조물 거리던 하얀 냅킨. 약간의 어색한 웃음 그리고 조용조용한 말투까지.
불안했고 어설펐던 젊은 시절 습관처럼 손톱을 물어뜯던 내가 떠올랐다.



기억이란 참 묘하다.
단순한 대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 순간이 남긴 인상에 따라 깊이 각인되기도 한다.
영일이와 나눈 대화는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영일군의 식사하던 손과 어색한 웃음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건축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일군은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실무 쪽에 관심이 많았다. 실무 경험이 전무한지라 감이라도 잡게 도와주려고, 과거의 경험들을 들려주었다.
독일 문화관 공사, K 건물 시공, 미국에서 일했던 이야기, 하○트 호텔 배관 폭발 사고… 건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실제적인 업무에서 생기는 여러 딜레마들을 말해주었다.

그는 젊은이 특유의 순수한 열정으로 이야기를 듣는듯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일군은 내가 편해졌는지 대화는 사적인 이야기로 흘렀다.
여자친구, 성적, 종교…
낯선 사람에게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지만, 나는 그 미숙한 솔직함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뻔한 느낌에도 계속 더 듣고 싶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오래된 일기장이 떠올랐다. 내 젊은 시절의 자료가 보고 싶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함께 묻어버렸던 기억들.

짐을 뒤져 먼지 쌓인 상자를 꺼냈다.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곰팡이 냄새를 좋아했다.
그 속에서, 잊고 있던 과거가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일기장을 펼쳤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잊혔던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젊은 날의 열정과 고민, 삶에 대한 갈망과 허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느새, 눈물이 흘렀다.
웃음이 나왔다.

나는 젊은 날 끊임없이 물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삶을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필사적으로 삶을 붙잡으려 했던 날들.

"저 산은 내게 내려오라 말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한계령 가사처럼 그때의 나는 삶을 지치고 힘든 투쟁처럼 여겼다.
모두가 버티기 위해 사랑을 갈구하고, 정치를 하고, 무언가에 의지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비참 속에 허덕이는 존재라고.
하지만, 반대로 인간은 삶의 주인이다.
우리는 무너져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삶을 놓아서는 안 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 깊은 슬픔이 검은 파도처럼 무겁게 밀려와 덮쳤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스러지고 싶었다. 그때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리고.. 아팠던 아내의 불 꺼진 듯한, 창백하지만 너무나 따뜻했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뼈저리게 그리웠다.



나는 숨을 몰아쉬면서 어두운 방구석 모서리에 쭈그리듯 무너졌다
그리고…
젊었던 내가 지금의 나를 안아주며 함께 울었다.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일기장 속에는 작은 흔적이 아직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바닥으로 녹아내리듯 주저앉았다. 그 순간, 방의 네 벽이 천천히 기우는 듯했다. 6면체 방이 서서히 회전점을 중심으로 돌기시작하는 듯 어지러웠다. 하지만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고 점차 초점이 회전 중심에 맞춰졌다. 난 힘을 다해 집중해서 지금까지의 삶을 하나하나 반추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수많은 불연속적인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호흡의 뜨거움은 시간의 벽을 타올라 모든 것을 하나하나 되새기길 요구했다.

내 사람들의 죽음과 지금껏 이어온 고독과 허무로 모든 것들이 엉망으로 뒤엉켜져 버렸다.

몇 개의 줄기들이 자라나 썩은 이파리를 내어 하늘을 막고, 뿌리를 내려 숨통을 조이고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것은 역겹고 괴로운 것이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인간은, 사랑은, 내가 꿈꿔왔던 모든 희망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죽어버린 심장으로 이미 10년을 넘게 살아왔다. 현실에 충실하자 해놓고는 현실 속에 죽어버린 지가 벌써 10년인 것이다. 이미 멈춰버렸던 심장은 사랑하는 이의 기수의 고통에 아무런 대답을 줄 수가 없었고 오로지 비참에만 처절하게 짓밟혀 걸어왔다.


이는 더 이상 안 된다. 더는 허용해선 안 된다고 누군가 외쳐대고 있었다.

그토록 과거를 열망한 까닭은, 이 비참에 대한 저항이, 그래도 늦지 않은 희망이 아직은 이 심장 속에 살아왔단 증거 아니겠는가.

이 일기장 속에 담긴 진실은 아직 멈춰져서는 안 된다고 나 스스로 고백해 왔던 것 아니겠는가. 하고 외쳐대고 있었다.


기수의 고개 숙인 얼굴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마주 앉아 있던 그 밤의 침묵이, 다시 내 귀에 들려왔다. 그 침묵을 깨야 한다는 듯, 내 안 어딘가에서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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