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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안 Apr 01. 2020

오버나이트 오트밀, 그 오묘한 세계

이 레시피에 필요한 건 오로지 시간 뿐이다

오트밀oatmeal을 처음으로 접했던 건 <안네의 일기>에서였다. 

8시 20분이 좀 지나면 위층의 문이 열리고 마룻바닥을 가볍게 세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오트밀이다.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깊은 접시에 오트밀을 담아서 내 방으로 돌아온다. 

- <안네의 일기> 중

안네 프랑크는 꽤 많은 끼니를 오트밀로 때운다. 작중에 묘사된 건 거의 '(먹을 게 없어 너무 싫지만 이걸로라도)때우는' 느낌의 서술이지만, 은신처라는 배경과 안네 프랑크의 아우라에 힘입어 그 생소한 음식도 꽤 로맨틱하게 와닿곤 했다. 숨겨진 은신처 바닥에 놓여 있는 텅 빈 음식 그릇.

인터넷에 'Oatmeal'을 치면 누가누가 예쁘게 먹나 경진대회가 열린다 (속임수다)
실제 귀리(oats)의 모습이다.

오트밀은 정확히 귀리를 볶거나 찐 뒤 분쇄하거나 압착하여 만든 가공품이다. '귀리죽'이라고도 번역된다. 정말이지 낭만도 자비도 없는 단어 선택이지만 사실 정확한 묘사다. 귀리를 물기 하나 없이 바짝 말렸기 때문에 톱밥과 비슷하게 느껴질 지경이고, 이걸 씹어서 소화시키려면 당나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좀 더 인간에 가까운 방식으로 먹고 싶다면 따뜻한 우유나 물에 불려서 먹어야 한다. 그러면 그대로 죽이 되어버리는 것.


문제는 그렇게 고생해서 한 그릇 만들어도 뭐랄까, 벽지를 뜯어다 물에 불려 먹는다는 느낌이 들어서 문제다. 낭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안네 프랑크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게 되는 맛이다. 혹은 한 주먹 얻어간 친구도 한숟갈 뜨고는 다 버렸다는 종이죽 맛. 이걸 먹느니 환자용 흰죽을 먹는 게 나을 듯한 맛. 전쟁통이 아니라면 도저히 맨정신으로 먹기 힘든 맛. 


그래서 며칠전 남자친구가 옆구리 한쪽에 끼고 온 큼지막한 퀘이커 오트밀을 보고 착잡하고 심난한 기분이 되었던 것이다. 자기 돈 주고 산 건 아니고,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가 호기심에 샀는데 상술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모임에 버리고 갔으며 남자친구는 역시 호기심에 주워 온 것이다. 사이즈는 또 어마어마하게 크다. 이 집에 당나귀는 없으니 사람 두 명이 저 큰 걸 먹어 해치워야 하는데 못 먹는다면 필요한 쓰레기봉투 크기만 20리터다. 바짝 건조해 있으니 보관은 용이하겠다.


만약 한국에서 코로나19 대비 사재기 바람이 불었다면 난 마트에 안 가도 됐을 것이다. 저 오트밀을 다 먹어치우고 나면 전염병이 사라져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심난한 상념에 빠져 오트밀 포장재에 그려진 아저씨와 눈싸움하고 있었다. 

퀘이커 오츠. '시리얼의 왕'이라고 불리는 헨리 파슨스 크로웰이 만든 제품이다. 저 아저씨가 입은 건 실제 18세기 퀘이커 교도의 복장이라고.

하지만 모든 요리의 역사가 그렇듯이, 인간은 맛없는 식재료를 어떻게든 맛있게 만들어내기 위해 분투하는 법이다. 요 몇년 사이 내가 모르던 레시피가 한국에 들어왔고, 그것은 오트밀과 인간 모두를 구원했다. 바로 오버나이트 오트밀Overnight Oatmeal이다.



오버나이트 오트밀, 그 오묘한 세계


나는 사실 오트밀 이 친구와 구면이다. 첫 직장에서 점심 대용으로 자주 먹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속이 부대꼈고 입맛이 없어 맛있는 걸 먹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른 선택지였다. 


머그컵에 오트밀을 몇 숟가락 넣고 우유를 부어 전자렌지에 몇 분 돌리면 포실포실 따끈한 것만 유일한 미덕인 죽이 완성되었고, 거기에 땅콩버터 한 스푼 넣어서 먹었다. 그건 뭐랄까, 반려당한 첫 보고서의 맛과 비슷한 것이다. 일단 두 개 다 종이 맛이 난다는 공통점이 있고, 퇴사하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이 특히 비슷한.

범박하기 짝이 없는 비주얼

그러니 누굴까? 이 맛없는 오트밀을 굳이 요거트나 우유에 적셔서 하룻밤 묵혀둘 생각을 한 사람은. 


네이버에 '오트밀'을 검색해서 나온 첫 번째 레시피가 오버나이트 오트밀이었다. 난 반신반의하며 요거트, 오트밀, 우유를 넣어 하룻밤 불려두었다. 우유를 꽤 많이 찰랑찰랑 부어 두었음에도, 다음날 오트밀은 우유를 꽉 채울 만큼 불어나 있었다. 전자렌지에 돌리는 것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부피였다. 역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한 입 먹었다. 

?! 그럴 리가 없는데?

가장 먼저 든 생각. 그동안 오트밀을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우유와 요거트는 잘 섞여서 부드러우면서도 적당히 새콤한 맛을 더해준다. 수분을 흡수한 오트밀은 꽤 여러번 씹게 되는데, 질겨서 그런 게 아니라 씹을수록 고소하고 은근한 단맛이 나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게 된다. 여기에 꿀이나 잼, 과일청, 생과일 등을 얹어 먹으면 금상첨화다. 너무 신기하고 맛이 좋아 나도 모르게 계속 먹다 보면 반 그릇 조금 넘어서 포만감이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점까지 너무 완벽한 한 그릇이다. 


와, 이렇게 맛있을 거면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 포장재 겉면에 써주지 그랬어. "당신이 오트밀을 어떻게 먹든 자유지만 객관적으로는 하룻밤 불려서 먹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면 내 첫 직장에서의 점심시간이 10% 쫌 즐거워졌을 수도 있는데. (그럴 리 없지만)


사실 오트밀은 영양성분 면에 있어서는 미움받을 구석이 하나도 없다. 일단 10대 슈퍼푸드 중 하나다. 자세하게는 다음과 같다.

1. 식이섬유가 풍부해 포만감이 높아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다.
2. 그외에도 높은 단백질 함량, 미네랄, 각종 비타민 등을 함유하고 있다.
3. GI지수가 낮고 베타글루칸 성분이 다량 함유되어 혈당 조절에 용이하기 때문에 당뇨에 좋다.
4. 칼륨 함량이 높아 동맥경화 예방, 심장병 예방, 신장병 등을 예방한다. 

뭐 좋은 것밖에 없는 듯… 유일한 단점은 100g당 칼로리가 315 정도로 꽤 높은 편이라는 건데, 이것도 자세히 뜯어봐야 한다. 귀리는 수분을 아주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한 끼로는 40g 정도만 먹을 수 있다. 그러면 한 끼 섭취 칼로리가 140kg 정도로 뚝 떨어진다. 곁들이는 요거트나 우유, 두유, 과일 등을 생각해 봐도 한 끼에 400칼로리를 넘기기 힘든 다이어트식이 되는 것이다. 


한 달 정도 다이어트하면서 샐러드, 오트밀, 군고구마, 채소를 곁들인 식사를 물릴 때마다 돌려가며 했다. 덕분에 주말마다 즐거운 음주 시간을 가지면서도 2.5kg를 감량할 수 있었다. 물론 퇴사 후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오트밀이 한 1/3 정도 기여도가 있다고 믿는다. 맛있어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거든. 


맛있는 다이어트식이라는 건 기적의 다른 말이다. 인생에는 그런 소박한 기적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좋을 수밖에 없다. 오트밀 최고. 



이렇게 먹었습니다

두유 요거트, 오트밀, 뮤즐리, 직접 만든 귤청을 넣었다. 이걸 최소 8시간 불리면 완성.

1. 요거트를 병 바닥에 2스푼 듬뿍 담는다. 난 두유 요거트를 넣었다. 두유로도 요거트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최근에 알았는데, 고소한 맛과 풍미가 더해지기 때문에 내 입맛에는 이쪽이 더 좋다. 우유 소비를 줄이고 있어서 더 반갑기도 하다.

2. 오트밀 세 숟가락을 넣는다. 바짝 마른 오트밀의 바삭바삭 소리가 듣기 좋다. 

3. 다시 요거트 2숟가락을 얹고, 그 위에 찰랑찰랑하게 우유나 두유를 붓는다. 아몬드 브리즈도 부어봤는데 별로였다. 비싸기만 하고.

4. 인정사정 없이 섞는다. 요거트와 우유와 섞여야 오트밀이 더 잘 불기 때문이다.

5. 다음날 오트밀이 통통하게 불어 있으면 피넛버터나 잼, 생과일, 과일청 등을 자유롭게 올린다. 씨리얼이나 뮤즐리를 넣는 사람 있다. 잘 섞어서 먹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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