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일의 썸머: 288일의 기억, 212일의 망각

사랑이 끝난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들에 대하여

by 동물의삽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


https://youtu.be/dGI1T41rv-o?list=RDdGI1T41rv-o

The Smiths · 사랑이 시작되던 날의 노래



영화는 처음부터 선언한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말을 믿으면서도 믿지 않은 채로 우리는 톰과 썸머의 500일 속으로 들어간다. 1일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288일, 그러다 11일, 다시 아무렇지 않게 162일. 뒤죽박죽으로 흩어진 시간의 파편들이 처음엔 낯설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기억이 원래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걸 알게 된다. 설레는 오후 한 장면이 불쑥 떠오르고, 아무 이유 없이 싸웠던 날이 먼저 치고 들어오고, 처음 손을 잡았던 순간이 뒤늦게야 선명해진다. 이 영화의 구성은 그 자체가 사랑의 문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두고 톰의 편과 썸머의 편으로 나뉜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준 사람에게 끝내 화답하지 않은 썸머를 나쁘다고 말하는 쪽이 있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감정을 일방적으로 투사한 톰이 문제라는 쪽도 있다. 하지만 그 논쟁은 어쩌면 이 영화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모르는 사람을 만나고, 서로에게 스며들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관계가 어떤 결말로 끝나든,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된다. 톰도, 썸머도,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바라보는 우리도.


"Just because she likes the same bizzaro crap you do doesn't mean she's your soul mate."

- 클로이 모레츠 (레이철 역)


이 영화에서 가장 날카로운 말들은 놀랍게도 톰의 어린 여동생 레이철의 입에서 나온다. 당시 열두 살이었던 클로이 모레츠는 어른들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정확하게 상황을 꿰뚫는다. 그녀가 오빠에게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송곳처럼 박힌다.


나이도, 경험도 부족한 아이가 어쩌면 이렇게 사랑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가 싶어 피식 웃으면서도, 어딘가 뜨끔한 기분이 든다. 우리도 한때 누군가를 보며 저런 착각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화면은 차분해진다. 뒤엉켰던 시간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듯, 이야기는 이제 흐름을 따라 움직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영화를 보는 우리도 자신의 어느 500일을 떠올리게 된다. 지금은 이름조차 잘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와 나눴던, 말랑하고 아팠던 그 시절의 기억들. 영화는 그것을 억지로 꺼내려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문을 열어 두고, 우리가 스스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리에 새로운 인연이 찾아온다. 어쩌면 그게 이 영화의 진짜 결말이다. 톰이 오디션장에서 처음 만난 그 여자의 이름을 묻는 장면. 수줍고, 설레고, 또 조금 겁먹은 그 미소. 500일을 통과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그 얼굴. 우리는 그 미소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팠던 만큼 더 단단해지고, 잃었던 만큼 더 유연해진, 그런 어른의 얼굴을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영상의 품격(7): 빛의 즉흥성, 홍경표 촬영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