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만화 작가들, 기억하십니까?

일본 만화의 습격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은 20세기 창작의 괴물들

by 동물의삽

대한민국 만화사는 '표절'이라는 비겁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일본 만화를 밀수해 베끼는 것이 생존 전략이었던 시절, 대본소의 굶주림은 작가들을 다작의 늪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 진흙탕 속에서도 자신의 뼈를 깎아 '독창성'이라는 성벽을 쌓은 천재들이 있었습니다. 다들 어디선가 본 스토리를 연재하던 그 시절, 자신들의 이야기로 승부하던 작가들 말이죠. 그때 그들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가 펜 끝에서 느꼈던 전율은 결코 가짜가 아니었습니다. 일본 만화의 그림자 아래서도 당당히 빛났던, 우리 만화사의 진정한 거장 10인을 소환합니다.



*리스트에 순위는 없으며, 작가님들 성함의 가나다 순입니다



고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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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화백을 꼭 역사만화가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남긴 발자취를 돌아보면 곡학아세 하는 먹물들의 허접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데요. 그가 남긴 만화들은 당시에도 파격이었고, 지금 보아도 깊은 통찰력이 엿보입니다. 가장 그의 천재성을 느끼게 하는 점은, 그의 작화에서 나타나는 동양화적인 여백에서 엿보이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리고 작품마다 담긴 고우영 화백만의 해학과 유머 역시 철학이 있는 작가였음을 증명하고 있죠.



굽시니스트


주로 웹 상에서 활동하면서 알려진 굽시니스트 작가이지만, 오늘 소개하는 이 만화는 리스트에 오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굽시니스트 작가는(자신은 부인하지만) 오타쿠이면서도 패러디에 가려지지 않는 천재성을 증명했는데요. 비록 보통 사람들이 그의 만화를 이해하기에는 약간의 장벽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누군가의 해설보다도 직접적인 노력으로 그의 진의를 이해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신세계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김삼


원래는 소년 활극으로 데뷔했던 김삼 화백은, 지금은 성인만화가로서의 발자취로 더욱 인정받고 있습니다. 80년대 소년지들에 연재했던 007이나 강가딘으로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던 소년들이, 부모님 몰래 보았던 성인 잡지에서 엄청 예쁜 여인들을 그리는 작가로 다시 보게 되었을 때의 충격은 컸는데요 이런 기억을 저 혼자만 가진 것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몇 년 전에 화백님의 부고 소식이 조용히 전해졌습니다. 부디 그곳에서 영면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김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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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에게 쌍문동을 알린 주민이자 대한민국 만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를 창조한 김수정 화백은, 어렸을 때 보면 명랑 만화지만 나이 들어서 보면 새롭게 다가오는 진중한 작품들을 만드셨는데요. 그의 서민적이면서도 현실감이 넘치는 스토리와 화풍은, 실제 작가의 경험에서 대부분 비롯된 사실이라고 합니다.


사춘기 시절 엄청 이입되어서 보았던 일곱 개의 숟가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스토리가 아니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네요.



박수동

어린 시절 박수동 화백의 소년 명랑만화들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었는데요.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과 가장 가까이에서 본 시선에 녹아있는 해학과 풍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펜이나 붓이 아니라 성냥개비에서 창조된 그의 독창적인 캐릭터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예술성을 갖춘 캐릭터라고 생각하는데요. 워낙 어려운 작업을 하시느라 작품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존경심으로 다가옵니다.



신일숙

대 서사시 아르미안의 네 딸들

순정만화의 탈을 쓴 장대한 일대기로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신 작가입니다. 게이머들에게는 리니지의 어머니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어린 시절 미용실을 찾으면 제일 처음으로 만화잡지 르네상스를 찾게 만들었던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용두사미가 판치는 한국 만화계에서, 역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거의 10년에 걸친 집념으로 완결시키셨는데요. 작품이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에 쏟는 정성이 남다름을 느낄 수 있겠습니다.




윤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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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호 작가의 이름을 모르시는 분들이라도 <이끼> 나 <미생> 등의 작품은 알고 계실 텐데요. 현재 대한민국 만화계에서 가장 중심에 선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야후>를 처음 접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요. 완성된 그림체와 가슴을 울리는 묵직한 스토리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작가 자신도 상당히 밀도 있는 삶을 살았음이 알려졌는데요. 앞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기대합니다.




이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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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단 하나의 작품에서도 일본 만화를 베끼지 않았다는 진정한 작가입니다. 80년대 만화를 조금이라도 알고 계신 분이라면 독고탁의 이름을 모를 수 없을 텐데요. 저도 어린 시절 <황금의 팔> 극장판을 뉴코아 예술극장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21세기 들어서도 스포츠 만화를 그리셨는데, 안타깝게도 지난 2016년 항년 69세로 영면에 드셨습니다. 화백님의 만화와 소년 시절을 함께 했던 저이기에, 큰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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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보셨을 미래세계의 상상도인데요. 이 짤의 주인공이 바로 이정문 화백입니다. 주로 심술 시리즈로 유명하신 명랑만화가지만, 김청기나 고유성 등이 마음껏 일본 만화의 캐릭터로 SF 만화를 선보이던 시절에 독창적인 캐릭터인 <철인 캉타우>로 한 획을 그었는데요. 놀라운 사실은, 이 작품이 리얼로봇물의 효시로 평가되는 건담보다도 먼저 나왔다는 점입니다.



황미나

작가를 대표하는 걸작, 레드문


한국 순정만화를 논하자면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거성, 황미나 작가입니다. 초기엔 일본 만화 표절도 있었고, 자리를 잡기까지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80년대 들어 순정만화의 붐을 일으키며 스타 작가로 발돋움한 후, 사실상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남다른 스케일과 소재로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고 계시죠.


<레드 문>은 황미나 작가를 대표할만한 걸작 중 하나이지만, 초반에는 진도가 쉽게 나가지 않는데요. 조금만 참고 넘기시면 비로소 이 작품의 진정한 전개가 시작되면서 독자를 빠져들게 합니다. 훗날 게임으로도 개발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들은 단순히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우리 세대의 빈곤했던 상상력에 비옥한 토양을 깔아주었습니다. 표절과 복제가 판치던 시대에도 끝내 창작의 고통을 선택했던 이 거장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20세기는 초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신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생 작가'는 누구입니까? 혹은 제가 이 리스트에서 놓친, 당신만의 천재 작가가 있다면 댓글로 그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낡은 만화책 냄새가 나던 그 시절의 온도를 함께 복원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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