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기꾼의 함성과 가장의 비명, 양재에서 고터까지의 강남 발전사
80년대 양재역은 3호선의 종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구파발처럼 한적한 동네는 아니었고 역 밖으로 나오면 말죽거리 특유의 그 왁자지껄한 시장통이랑 먹자골목이 사람 냄새를 확 풍겼죠. 그런데 말이죠, 자정이 가까워지면 그 활기차던 공기가 소름 돋게 바뀝니다. 사람들의 날이 선다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에게는 훗날 '말죽거리 잔혹사'란 영화의 제목으로 다시금 알려졌지만, 차량을 이용한다면 몰라도 걷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였습니다. 영화의 무대인 고등학교까지는 실제 직선거리로도 3km에 가까워서, 보통 속도로 걸으면 한 시간은 넉넉히 걸리죠.
지금 양재역 환승주차장 건물 앞의 있는 인도를 낀 자리, 그곳이 밤마다 아주 전쟁터였습니다. 버스는 이미 끊겼고, 성남이나 과천으로 넘어가야 하는 사람들은 눈이 벌게져서 그 길목으로 쏟아져 나오거든요. 거기 서 있으면 택시 기사들이 갑 중의 갑이었어요. 미터기요? 그런 건 아예 보지도 않았습니다.
기사가 창문을 쓱 내리고 멈추어 서면, 승객들이 '성남 가요? 수원? 과천?'하고 외칩니다. 그러다 행선지가 맞으면 딱 한마디 던지는 거죠. '성남 타세요.' 그럼 모르는 사람 넷이서 택시 안에 몸을 구겨 넣는 겁니다. 요금은 무조건 '두당 오천 원'이었어요.
생각해 보세요. 당시 짜장면 한 그릇에 오백 원 하던 시절인데, 인당 오천 원이면 짜장면 열 그릇을 사 먹을 거금 아닙니까. 그런데도 그 돈을 내고 택시 시트에 머리를 뉘면, 그렇게 비참하면서도 드디어 집에 간다는 사실에 안도가 됩니다. 피 같은 열흘 치 점심값을 기사한테 넘기면서 속으로 얼마나 다짐했을까요.
'다음 회식 땐 기필코 일찍 일어나리라.'
그 비싼 돈 들여서 사고 싶었던 건 거창한 게 아니었어요. 몇 시간 뒤면 다시 강남 가는 버스에 몸을 실어야 하는데, 그전까지 허락된 단 네다섯 시간의 잠. 양재역 다음으로는 전철역도 없던 그 시절, 종점 양재역은 우리 아버지들이 자신의 비상금을 털어야 했던 시린 추억의 장소였습니다.
양재역의 택시 전쟁터를 지나 한 정거장 올라오면, 풍경은 순식간에 삭막해집니다. 당시 남부터미널역은 화물터미널 역이었죠. 역 밖으로 나오면 사람보다 집채만 한 카고 트럭들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그 거대한 바퀴들이 아스팔트를 짓이기며 지나갈 때마다 지면이 파르르 떨리는데, 그 굉음 사이로 묘한 냄새들이 섞여 들었습니다.
당시에는 경부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가 지금의 양재 만남의 광장 휴게소 근처였는데요. 거기서 가까운 서초동의 화물 터미널은 예전에는 그곳이 서울의 관문이었음을 증명합니다.
터미널에는 주로 장거리를 뛰고 잠시 쉬는 트럭 기사들을 위한 식당이 있었습니다. 세련된 강남의 맛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투박하고 진한 국물 냄새가 터미널의 매연과 뒤섞여 묘한 활기를 만들어냈죠. 그리고 터미널 밖의 길을 지키던 노점상 리어카들도 빼놓을 수 없네요.
노란 고구마채를 산처럼 쌓아놓고 기름 솥에서 갓 튀겨내던 그 달콤하고 고소한 냄새,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던 짭짤한 번데기 리어카. 거대한 트럭들이 뿜어내는 위협적인 엔진 소리 속에서도 사람들은 그 리어카 앞에 멈춰 서서 단돈 몇 푼에 허기를 달랬습니다. 투기꾼들이 땅값을 올리며 함성을 지를 때, 누군가는 그 흙먼지 날리는 터미널 식당에서 식은땀을 닦으며 비명 같은 하루를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그 고구마채 튀김 하나가 그 시절 우리에게는 가장 달콤한 위로였을지도 모릅니다.
남부터미널의 그 시끄러운 트럭 굉음에서 조금만 벗어나 교대역 쪽으로 걸어 올라가면, 공기는 금세 차분해졌습니다. 당시 교대역 인근은 참 호젓한 주택가였거든요.
남부터미널에서 교대역 사거리로 향하는 길, 한쪽으론 서울 교대의 긴 학교 담장이 끝없이 이어지고 반대편엔 기껏해야 5층 정도 되는 낮은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죠. 높은 건물이 없으니 시야가 막힘없이 터져 있었습니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주변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한눈에 들어왔죠.
그렇게 걷다 서초 종합시장이 있던 교대역 사거리쯤에 다다르면, 저 멀리 서초역 사거리에 홀로 우뚝 서 있는 800년 넘은 향나무의 위용이 보였습니다. 지금처럼 고층 빌딩에 갇혀 숨 가쁘게 서 있는 나무가 아니라, 낮은 서초동의 지평선 위로 당당하게 솟아올라 온 동네를 굽어살피던 그 시절의 주인 같은 모습이었죠.
투기꾼들이 땅값을 올리며 함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이 길목만큼은 아직 그 소란스러움이 닿지 않은 듯 평온했습니다. 800년 향나무가 뿜어내던 그 압도적인 고요함과, 낮은 주택가의 평화로운 풍경. 그게 바로 강남 발전사가 삼키기 직전의,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는 서초동의 민얼굴이었습니다
3호선 고속터미널역의 지상에는, 우리를 압도하던 서울 고속터미널의 거대한 콘크리트 성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터역은 지금이야 복잡한 환승역이지만, 그때는 오직 3호선뿐이었죠. 환승 따위 없던 시절이라, 전철역에서 내린 그 어마어마한 인파가 오직 한 방향으로만 쏟아져 나오는데 그 에너지가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 인파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이 바로 반포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였습니다. 사람들이 서너 줄로 스쳐 지나가도 어깨를 부딪치지 않을 만큼 시원하게 뻗은 통로, 그 양 옆으로 옷가게와 식당은 물론이고, '한가람문고' 같은 대형 서점까지 들어앉은 지하의 거대한 계획도시였습니다. 거기서 책을 고르고 쇼핑하고 끼니를 때우며 사람들은 강남의 풍요를 맛봤죠.
지상으로 올라오면 더 기가 막힌 광경이 펼쳐집니다. 집채만 한 버스들이 램프를 타고 건물 2층 플랫폼까지 직접 치고 올라가 승객을 태우고 다시 쏟아져 내려왔거든요. 특히 외국에서 들여온, 내부에 화장실까지 딸린 그레이하운드 버스는 그 자체로 선망(화장실 근처 승객만 빼고)의 대상이었습니다.
장거리 노선이라도 타면 운전석 위에 매달린 브라운관 TV에서 비디오 영화를 틀어줬는데, 그 작은 화면을 보며 무료함을 달래던 게 당시엔 얼마나 큰 낭만이었는지 모릅니다.
지하에선 한가람문고의 종이 냄새가, 지상에선 빼곡히 들어찬 상가와 뉴코아 백화점의 화려한 조명과 버스의 매연이 뒤섞이던 곳. 기차의 선로보다 도로 위 비디오 영화가 더 매혹적이었던 그 시절, 고속터미널은 전국에서 올라온 가장들의 비명과 투기꾼들의 함성이 가장 거대하게 공명하던 강남 발전사의 화룡점정이었습니다.
*다음 주, 잠원-옥수로 이어지는 3호선 전철역과 서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