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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빛비즈 Mar 18. 2022

영국에 창문 막힌 건물이 존재하는 이유

충격적인 역사 속 세금 이야기

영국의 모든 집에는 난로가 있었다.


1662년에 난로세가 법으로 강제되면서 20실링(현 가치로 5,000달러 상당)이 넘는 주택은 모든 화덕, 난로, 벽난로 1개당 1실링을 연 2회 납부해야 했다.


그때까지 직접세의 부담을 지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 조치로 갑자기 납부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구호 대상자까지 여기에 포함되었다. 건당 수수료를 받던 징수원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집안 곳곳 남기지 않고 뒤졌다. 영국인들은 이 세금을 증오했고, 이것이 1688년 명예혁명을 일으킨 큰 요인이었다.


새로 왕이 된 윌리엄과 메리는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으로 난로세를 없앴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전 왕인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킬 전쟁을 준비하느라 네덜란드로부터 빌린 돈이 아직 남아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 벌인 9년 전쟁 비용도 갚아야 했다. 그런데 왕은 돈이 모자랐다. 어떻게 해결했을까?


에든버러의 한 건물(출처_Kim Traynor/Wikimedia)


1696년에 해결방안을 찾았다.
‘창문세’라는 또 다른 세금으로.


징수원들은 집 앞을 지나며 밖에서 창문만 세면 되었다. 납부자와 다툴 일이 없고 자진신고도 필요 없었다. 창문은 숨길 수 없으니 탈세도 불가능했다. 시민들은 세금을 내는 대신 창문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이에 정부가 세금을 줄이지 않고 오히려 늘리자, 창문이 거의 없는 집들이 지어졌다.


그러자 의도치 않았던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전기나 가스, 석유를 이용한 조명이 도입되기 전이라 햇볕과 신선한 공기를 차단하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일이었다. 산업혁명기에 도심지에 유행했던 여러 전염병 중에서 특히 발진, 장티푸스, 홍역, 콜레라는 좁고 축축하며 창문 없는 집에서 더욱 창궐했다. 19세기가 되자 여기저기서 창문세에 대한 반대가 터져 나왔고, 185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폐지되었다.


창문세가 폐지되길 바라는 가족을 그린 만화(Richard Doyle, 1754)


창문세는 세금이 어떻게 탄생해서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 진행 과정을 보면 세금의 전형적인 라이프 사이클을 알 수 있다.


세금은 필요에 의해 법으로 제정된다.
도입될 때는 적은 금액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진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의 행동과 판단이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한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정부의 필수적인 활동에 드는 자금을 적절한 시기에 조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해결 방법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윈스턴 처칠이 세금을 왜 ‘필요악’이라고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너무 악하면 필요 없어진다는 것이다.



* 참고자료 : 책 <세금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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