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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가 Apr 11. 2020

삼박자 외출

임의적인 마음가짐

지난번 포스트에 4월의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해서 얘기를 했었는데 그 글을 올린 2일 오후에 마법처럼(?) 날이 흐리고는 그 이후로 또 줄곧 맑은 날이다. 예보를 확인했더니 앞으로 2주도 비가 올 예정이 없는 듯하다. 기온은 이미 20도를 넘어서서 집에서도 봄옷을 꺼내 입고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재택 경험+남들보다 긴 공부 시간으로 훈련된 습관 중 가장 강력하게 효과가 있는 건 바로 집 안에서도 잠옷과 생활복/근무복을 구분하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로테르담은 지도 상에서 오른쪽 중간쯤 115의 주황색 푯말 보다 살짝 내륙인 곳에 위치해있는데 대기질이 가장 나빴을 때는 130까지 치솟기도 했다.

지난 한 주는 대기질이 너무 안 좋았는데 런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네덜란드에서는 흔치 않게 집에 하루 종일 있으면서 환기 조차 마음껏 못 했던 답답한 한 주가 지나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파랗고 쨍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창문을 활짝 연 채로 청소기도 돌리고 쓰레기통도 비우고 부지런히 외출을 준비해 나섰다.

열흘 만에 외출이었다. 그러니까 4월이 된 후로는 처음이다. 뭘 하든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 요즘 같은 시기에 성공적인 외출을 위해서는 아래의 세 조건이 따라주어야 한다.

해가 나는 맑은 날씨이되 기온이 평소보다 높지 않은 날이어야 한다. "너무" 따뜻한 날이면 너도 나도 산책을 나와 거리두기가 쉽지 않다.

강풍이 불지 않고 대기질이 깨끗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오래 걸어도 지장이 없는 환경이어야 한다.

위의 조건을 충족하는 날이 평일이어야 한다. 재택근무 등으로 평일이나 주말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주말에는 조금 더 붐빈다. (강가에 놀러 나오는 사람들이 아직도! 정말 많다. 집에서 창밖으로 다 보인다) 그리고 이왕이면 점심시간 전에 외출하는 것이 좋다.

천 마스크를 끼고 강가를 걷고 있었는데 어떤 백인 노년 남성이 "냐ㅎ오" 같은 소리를 낸 걸 보니 나한테 "니하오"를 하려던 게 분명하다. 코로나 사망률이 웬만한 나라들보다 높은 네덜란드인데 아직도 마스크는 아시안들이나 쓰는 거라는 멍청한 생각을 한다. 이 시국에 인종차별이라니 도대체 백인 남성의 삶은 얼마나 안락한 것일까? 하지만 간만의 외출에 기분을 망칠 수는 없으니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속으로 저주를 좀 해준 뒤 빠르게 지나쳐왔다.
좋아하는 줄무늬 티셔츠도 입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을 때, 아무튼 간에 좀 신나는 일이 필요할 때 자주 찾던 단골 카페는 코로나 조치 이후 테이크아웃만 제공하고 있다. 이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은 호주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플랫화이트가 정말 압도적으로 맛있다. 하지만 마시고 나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나는 보통 라떼를 주문한다. 라떼도 다른 카페들보다는 훨씬 진하고 양이 작아서 묘하게도 스페인에서 먹던 cafe con leche와 가까운 맛이 난다. 오늘은 날씨가 정말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좋고 다음 외출이  언제가 될지 모르니 과감하게 아이스 라떼를 시켰다. 레몬 머랭 와플이 이번 주에 새로 추가된 디저트 메뉴로 적혀 있길래 이것도 하나 시켰다. 평소라면 운하가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아 햇살을 쬐었겠지만, 지금은 1.5m를 지켜 줄을 선 뒤 문 앞에서 결제를 하고 다시 멀찍이 서 주문이 나오길 기다려야 한다.

커피와 와플을 받아 들고선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운하 벤치에 가 앉았다. 그 주변에는 늘 식물로 가득 찬 배가 정박해있는데 오늘 보니 튤립이 화사하게 피어있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비치는 꽃잎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또 오늘따라 라떼는 왜 이렇게 맛있는 건지. 조금 더 걸어 내려가면 좋아하는 빵집이 나온다. 지난번에는 오후 늦게 도착해서 남은 빵이 거의 없었는데 오늘은 다행히 크로와상도, 곡물빵도 남아 있었다. 이 빵집에서는 생긴 것부터 진정성 가득한 잼을 파는데 오늘은 평소에 못 보던 딸기잼이 있길래 이것도 한 병 샀다. 딸기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기도 하니까. 마침 집에 있는 무화과 호두잼도 거의 다 먹어가니 타이밍이 좋다. 계산을 하고 빵이 담긴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는데 갓 구워 나온 빵이었던지 평소보다 따듯하다. 이대로 식게 두기는 아쉬워서 구태여 손세정제를 꺼내 손을 한 번 더 닦고 크지 않은 조각 하나를 꺼내 먹었다. "오늘은 뭔가 되는 날"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맛이다.

한국의 거리두기 정책과 다르게 네덜란드는 3월 15일부로 카페, 식당 등 모든 외식 공간의 영업 범위를 포장 및 배달로 제한시켰다. 이 조치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단연 지역 내 소상공인들이었는데 이에 대응해 단골 고객들과 지역 주민들, 가게 사장들이 힘을 모아 "support your locals" 해시태그를 확산시켰다. 평소에 팔지 않던 특별한 메뉴를 기획하기도 하고,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 빙고 게임이나 퀴즈쇼를 열기도 한다. 지역의 빵집, 목장, 와이너리, 브루어리, 카페, 식당, 농장 등이 협업해 일주일치 식료품 상자를 판매, 배달하는 서비스도 있다.

아까는 강가를 따라 산책했는데 그 사이 햇살이 더 좋아져서 약간 붐빌 것 같으니 시내를 가로질러 가기로 한다. 누가 갑자기 "Can I ask you something?"이라며 영어로, 네덜란드어로 두 번이나 말을 걸길래 잠깐 발걸음을 멈춰 섰지만 '왜 하필 마스크 쓴 나한테...?'라는 생각이 들어서 손짓으로 양해를 구하고 지나쳐왔다. 아까 나한테 기어이 '니하오'를 외친 백인 아저씨의 영향도 없지 않다. 슈퍼에 잠시 들러 빵과 함께 먹을 아보카도와 크림치즈, 요거트까지 사고 나니 든든하다.

오늘의 행복에 기여한 순간들

집에 오니 우편함에 기다리던 편지가 도착해있다. 사실 몇 주를 기다렸던 편지라 외출을 하지 못하는 중에도 세탁을 하거나 분리수거를 하러 지하에 내려갈 때 틈틈이 들러 확인해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세금고지서나 개인정보 등록 안내 같은 중요하지만 따분한 정부 우편만 와있을 뿐이었다. 발걸음을 재촉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 집에 오자마자 서둘러 봉투를 열었다. 한 달이 걸려 도착한 엽서다 보니 왠지 더 반가운 데다 애틋한 마음까지 든다.  사이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고  동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새삼스럽다. 그저께 통화한 다른 친구가 이제는 코로나 관련 정보에 너무 지쳐서 코로나 이전의 텍스트만 읽고 싶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유 때문일지 한 달 전에 써진 안부인사가 순간적으로 최근의 걱정을 싹 씻겨 내주는 것 같다.

입주 때부터 속을 썩이던 현관 자물쇠를 어제 드디어 교체했는데 하루 만에 다시 고장이 났다. 한 달째 나를 스트레스에 몰아넣고 있는 층간 소음은 위아래, 심지어 두 층 건너 이웃들에게까지 물어보았는데 아무도 자기는 아니라고 한다. 나의 추측은 옆집이고 사실 증거도 있는데 막상 이야기를 해보니 역시나 또 자기는 아니라고 한다. 내가 남긴 장문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꽤 진심 같고 사람도 좀 착해 보여서 "이 사람이 지금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나?" 추궁하기도 뭐하다. 그나마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2주 전에 비하면 요즘은 견딜만하고, 그 사이 귀마개도 샀으니 어떻게든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바지락을 넣은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한다.

이런저런 변수를 다 고려한 외출이라고 하더라도 다시 돌아와 집 현관문에 열쇠를 꽂을 때는 늘 (1)목표했던 즐거움 (2)예상 밖의 즐거움 (3)예상 밖의 불쾌함과 함께 귀가를 하게 된다. 단순하게 따져봐도 아무튼 즐거움의 비중이 더 크니 나간 게 후회되는 산책이라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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