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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루 May 16. 2018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열차, 2등석과 부산아가씨

To train

러시아 시배리아 횡단열차를 탑승하려는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 중 한가지는 어떤 좌석을 예매할 것인가이다. 일반적으로 3등석을 선택하지만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것 외에 많은 장단점이 있다. 열린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을 자의 혹은 타의로 만나 다양한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사생활이 거의 없어지고 모두와 부딪히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 3등석이다. 그러나 2등석은 조금 달랐다. 

이르쿠츠크역이었어. 이제 러시아에서의 가장 추운 여행을 마치고 따뜻한 모스크바로 향하는 열차를 탈 참이었지. 알혼섬에서 이르쿠츠크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만큼이나 험난했어. 자기 숙소가 어딘지 모르는 중국인 여행객은 그렇다 치고, 기사 아저씨가 우리 숙소를 잘 몰라 한시간 정도를 빙 돌아 와야 했거든. 처음 이르쿠츠크에 도착했을때와는 달리 짐을 가득 손에 들고 나온 우리들은 분명 많이 지쳐있었어.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 'TO TRAIN' 문을 지나자마자 새로운 기대감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라.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이 정도면 거의 마법의 문이나 다름없어.



새로운 출발

다시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과  긴 여행을 마치는 사람들이 뒤섞인 역은 언제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해. 러시아식 모자를 쓴 경찰들도 비슷한 감정이길 바라. 보안기계를 통과할때면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괜히 긴장하게 되는 것하고는 조금 다르지만. 블라디보스톡에서 받은 열차표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시계를 확인했지. 여유있게 도착했으니 늦을리는 없어. 무거운 배낭을 의자에 아무렇게나 올려주고선 홀가분해진 몸과 마음으로 역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어. 보통 시계 숫자 색이 붉은색인데 여기는 녹색이더라. 이것조차도 새로운 기분이었어. 그리고 우리와 아주 가까이, 한국인 아가씨들이 있었지. 우리와 같은 열차를 타기 위해서 말이야.




깔깔깔

너희들을 아주 잘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라 생각해. 20대 초반에 싱그러운 너희들은 지나치리만큼 발랄했고 잘 웃었어. 출발 전 많은 짐을 들고 함께 조우한 우리는 좋은 싫든 한 열차에서 4박 5일을 보내야 하는 운명 공동체가 된거야. 나중에 여행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자료를 정리하는데 우연히 너희들이 찍혀 있는 사진을 발견했지. 이때부터 뭔가가 시작된 거라고. 
너희들은 2등석에 탑승한다고 말했어. 우리는 언제나처럼 장난을 치며 설국열차의 꼬리칸과 그렇지 않은 등급을 이야기하며 웃었어. 2등석 어르신들인 너희든 매우 자애로운 모습으로 3등석 꼬리칸 승객인 우리를 초대한다고 말했지. 이제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열차 내 2등석에 가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단다. 그런것 있잖아. 그들만이 사는 세상. 뭔가 아주 돈이 많고 고상한 사람들이 탑승하는 곳이 2등석이 아닐까 생각했어. 타이타닉 영화를 봐도 그렇잖아. 나는 처음 만났지만 처음 만난 것이 아닌 사람들인양 그자리에서 연락처를 교환했어. 3등석 승객이 2등석 칸으로 가 있어도 되는것인지, 열차 칸을 이동해서 만날 수 있는지 모든 것이 확실치 않았어. 우리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은 또다시 새로운 시도를 불러오는 것이었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 그게 너희들이었어.




왜 연락이 안돼요?

미안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심은 날짜 기한이 끝나서 더이상 인터넷이 되지 않았어. 2등석에 있는 한국인 20대 여성이라는 사실과그리고 더이상 아무말도 전송되지 않는 휴대폰이 내가 가진 전부였어. 그러다 뀨가 다행히 전날 저녁때쯤 입수한 유심으로 연락을 취했더라. 나는 그때까지도 아무런 대화를 확인할 수 없었어. 이르크루츠에서 얼굴을 보기로 약속했던 우리는 하루하고도 반나절 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어. 
솔직히 말할게, 세명 한국인이 주르륵 우리를 향해 개구진 웃음을 웃으며 다가왔던 상황이 참 웃겼어. 우리 모두는 전혀 화장하지 않은 쌩얼이었잖아. 나는 가끔 일어나자마자 화장실에서 내 얼굴을 보고 못생긴 두꺼비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날은 우리 모두 가족 두꺼비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거든. 그런데 서로 발가벗고 아무렇지 않게 웃어대는 그런 두꺼비 가족 말이야. 혹시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할게. 그때 대장 두꺼비는 바로 나였다는 것은 꼭 기억해줘. 
약속은 깨지기 쉬운 얇은 유리병 같아. 누구 하나라도 작은 의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어디선가부터 실금이 시작되고 약속으로 만든 유리병은 부서지고 말아. 그런데도 너희들은 우리를 찾아 식당칸을 지나고, 차장실을 지나고 무서운 조선족 아저씨들이 있는 칸을 지나 온거야. 분명히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해. 게다가 그렇게 몇 칸이나 이동하면서 바로 바깥과 이어져 있는 위험한 연결고리를 지났고 맨발에 슬리퍼 차림이라 매우 추웠을 거야. 그런데도 우리를 찾아 온거야. 나는 그게 굉장히 감동적이었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너희들은 재단하지 않았어. 있는 그대로 믿어준거야. 
썸경과 윤썬, 너희 이마에 말려있던 구르프는 아마 평생가도 못 잊을 거야. 동그랗고 긴 원통형 왕관같았거든. 사실 다른 러시아인이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면, 나는 한국식 티아라라고 말해줄 참이었어. 그리고 나는 너희를 그렸어.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이 순간을 담기 위해 사진도 찍을 수 있지만, 더더욱 함께 있는 지금을 남기고 싶었어. 그래서 그렸던 거야. 즐거워하는 모습과 웃는 소리를 그림으로 모두 담고 싶었어. 또 나를 오래도록 기억해주기를 바라면서.



2등석으로의 초대

2등석의 첫 이미지를 이야기해볼게. 일단 비싼값을 하더라. 고급스럽고 프라이빗한 공간이야. 특별히 복도에는 양탄자도 깔려 있다고. 개별 난방과 개별 소등을 할 수 있어. 3등석의 가장 큰 문제인 콘센트도 칸별로 별도 사용이 가능하지. 오랜 친구사이인 너희들이 차지한 2등석 어느칸은 정말 아늑하고 따뜻했어.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더라. 꼬리칸 사람이 이렇게 2등석에 와 있어도 되는지, 조금 황송한 마음도 들었지 뭐야. 그래도 2등석 어르신들이 우릴 불러주었으니 차장님이 오셔서 뭐라해도 괜찮을 것 같은 마음도 들었다고! 
첫 날 밤, 우리가 떠나고 난 다음 많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윤썬과 쥰의 몸이 많이 좋지 않았다는 걸. 게다가 썸경은 1층에서 오바이트 폭포를 마주해야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는 실제로 '헉'소리를 냈어. 새벽까지 정리하느라 많이 힘들었겠구나, 우리에게 연락할 수도 있었을 텐데 스스로 잘 해낸 것이 대견하기도 했어.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이야기하던 날이라 우리 모두의 감정은 모두 오버상태였던 것 같아. 한계치까지 치달아서 내가 무슨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몽롱한 상태 있잖아. 아마 그랬던 거라 생각해. 그래서인지 우리에겐 다음날이 더욱 즐거웠잖아?



두뇌 싸움

훌라게임은 정말 재미있었지? 나는 열차를 타고 나서 한 두번 해 봤던 게임이야. 그런데 아무리 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 머리가 굳어서 그런가, 다들 이렇게 재미있게 게임하는데. 조금 시무룩해졌어. 하지만 나도 스승님이 생겼다고! 뀨는 내 옆에서 훌라 개인지도를 해 주었어. 다들 공감했겠지만, 카드 게임을 가르쳐준 스승님이 옆에서 내 카드를 보고 있는 상황이 참 긴장되더라. 참 신기하게 모두들 어쩜 그리 빨리 배워 응용하는지 놀랄 뿐이었어. 서로 게임을 배운 사람이 달라서 누가 마지막까지 카드를 털지 못하는지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되는 것도 꿀잼이었고 말이야. 우리의 시간은 소모적이지만은 않았어. 감정을 쏟아내는 만남도 있었고 이렇게 뇌세포를 최대한으로 끌어다 사용하는 시간도 있었잖아? 물론 단지 게임만은 아니었지. 아마 뀨가 시작했던 것 같다. 꼴찌에게 잊지못할 추억을 선사하자는 제안 말이야!


우리의 싸움은 노을이 훌쩍 넘어가는 시간까지도 계속됐어. 가장 늦게 훌라게임에 참전한 윤썬이가 뀨의 트랩에 걸려들었지. 나도 이해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참여한지 얼마되지 않아 손에 땀이 났다고! 우연히 몇 번 연승을 거듭했지만 그건 내 진짜 실력이라고 하기보다는 운이라고 말해둘래. 눈밭에 구르고, 노래를 부르고, 엉덩이로 이름을 쓰는 미션이 하나씩 등장할때마다 우린 모두 진지했잖아. 만나자마자 열차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신나게 떠들었던 우리가 이때만큼은 세상천지 다시없을 정도로 진지했지. 마작, 화투, 그 무엇이라도 좋아. 엄청나게 많은 돈을 쌓아놓고 갖은 술수와 신경전을 벌이며 담배를 뻑뻑피워 주위가 모두 하얀 구름으로 가득한, 어두운 암실과도 같은 그런 상황이었어. 실은, 썸경, 윤썬, 쥰 모두가 골고루 미션에 걸리길 바랐어. 너희의 러시아 여행기를 들으며 잊지못할 기억을 만드는데 이만큼 적당한 선물은 없을 거라 생각했어.

벌칙 대상자가 결정됐어. 모두 긴장하는 눈빛이었지. 열차는 한 두시간 열심히 달렸고, 한 역에 정차했지. 우리는 차장님 뒤에 딱 붙어 열차가 멈추자마자 우르르 줄을 지어 내렸어. 마침 플랫폼 높이도 적당하고 가로등 불빛도 부드러웠고, 사람들이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이 쌓여 있더라. 너희가 하얀 눈밭에 눕자마자 나는 열심히 눈을 퍼부었지. 윤썬이가 노래를 부르고 엉덩이로 이름쓰기를 하는 것은 다른 칸에 타고 있던 러시아인들에게도 분명히 좋은 추억을 안겨 주었을거야. 너희, 우리, 다시 볼일 없는 러시아인들에게도 재미있는 이벤트였거든! 



특별한 아침도 고마워

별도로 아침을 주문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날, 함께 먹었던 아침은 2등석 손님으로 따로 주문한 치킨덮밥과 블린아주머니의 블린이었지. 음식을 베푼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야. 배고픈 나와 뀨를 위해 탐스러운 닭고기와 밥을 나누어 주어서 고마웠어. 몇 주 만에 만나는 닭고기인지, 닭볶음탕과 비슷한 식감이라 집에 와서 엄마밥을 먹는 것 같더라. 라면이나 전투식량, 끊임없이 불량식품같은 간식을 한도 끝도 없이 먹는 열차 생활 속에서 이런 수준의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도 못했어. 게다가 간식과 티슈, 후식캔디같은 것도 함께 딸려오는 것을 보니, 참 놀랍더라. 한국에 돌아가면 꼭 3등석만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겠어. 




우리는

참 신기한 일이지? 모스크바에서 머무는 숙소도 같을 줄이야. 어쩌면 러시아 여행의 마지막은 우리가 함께 모여 장식하는 것으로 결정돼 있었나봐. 거기다 4인실 예약한 것까지 똑같았지. 친한 친구끼리라도 여행하면서 부딪히는 것이 많기 마련인데 우연히 다른 세상에서 살던 우리가 모여 같은 방향을 보며 걸어가게 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야. 우리들의 에너지가 좋은 방향으로 잘 섞인 때문이겠지. 
어렸을 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고집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어. 온 세상은 그저 나밖에 없는 줄 알았지. 하지만 세상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나 자신을 지키는 것보다 모두를 우선하는 것이 더 나은 가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어쩌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하고 어딘가를 '가야만'하고 누구를 '만나야만'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즐거운 여행을 한 것일 수도 있어. 그만큼 서로를 믿고, 신경쓰고, 조심스럽게 배려했으니까. 


서로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것, 그리고 내 색깔의 채도를 조금 낮추는 것. 우리의 여행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믿어. 햇빛이 강해서 눈을 뜰 수 없는 오전보다, 온 세상을 오렌지빛으로 부드럽게 밝히는 일몰시기를 매직아워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의 여행은 오렌지색이라고 해 두자.  어쨌거나 우리는 우리 나름의 색으로 각자 아름답게 러시아 여행을 마무리했다는 것이 중요해.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그 꽃', 고은






너도 알다시피, 지난 한 주는 정말 슬프고 힘들었어.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귀도 들리지 않았어. 우리가 약속한 유리병이 깨져버렸던 날, 나는 정말 많이 앓았어. 오해를 받아서였다거나 그저그런 사람으로 기억된다는 것에 대한 실망감 때문은 아니었어. 그렇게도 많은 감정과 이야기와 눈빛을 공유했던 찰라들이 한 순간에 시들어 버리는 것 같은 경험을 했거든. 기억이라는 것은 이렇게도 예쁜데 다시 꺼내보지 못할 무언가가 된다는 것이 참 슬프더라. 어차피 우리는 앞으로도 동그란 지구의 각자 레일위에 서서 열심히 앞으로 향해 달려갈텐데 말이야. 나름대로 원을 그리며 살다가 우연히 살짝 부딪혀서 만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 
'마지막으로' 함께 공유했던 시간은 내가 이제까지 판단했던 결정 중 가장 의미있었던 때라고 할 수 있을 거야. 다시 진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추억과 기억을 장식할 누군가의 배경이 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야. 아름다운 그때의 우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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