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색 자기장의 낭만적인 이동
무르만스크는 러시아 북서부 무르만크스크주에 있는 지역이다. 북극권 북쪽 200km지점에 있으며 러시아의 부동항으로서 중요한 입지, 세계 최대 도시로 의미가 깊다. 과거 제 1차 세계대전 시 군수 보급항이었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연합군의 물자 양륙지점이기도 했다. 1978년 소련 당시 대한항공 kal기 강제착륙사건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무르만스크에 가 본 사람이라면 다들 느끼겠지만 꽤 적막하고 차갑고 딱딱하다. 거기다 지금은 겨울. 언젠가 꼭 가보려 마음 먹고 있는 북극, 북극권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언젠가 북극에 가보고 싶어." 나의 말에 R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히말라야에 가자고 했을 때에도, 아이슬란드에 가자고 했을때도 비슷한 표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빈 말은 하지 않아." R이 가볍게 넘기는 것 같아서 한 번 더 힘주어 말한다. 또다시 부드러운 웃음이 돌아온다. 언제나 그는 그랬다. 내가 계획하는 여행과 일정을 별말없이 함께 해 주었다. 아무 말 없이 응원해주는 것도 이렇게 큰 힘이 될 수 있구나, 그를 통해 느낀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 러시아 무르만스크를 여행 일정에 넣었다. 그러나 실은 오로라를 진짜 보고 싶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R이었다. 몇 년 전, R은 자신의 버킷리스트 몇 개를 내게 공개했는데, 그 중 하나가 '죽기 전 오로라를 보는 일' 이었다. 우리는 많은 일상을 함께 공유했고 어느샌가 내 버킷리스트에는 그와 같이 '오로라 보기'가 추가됐다. 작년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에는 여름이고 백야 기간이었으므로 당연히 포기했지만 우연히 보았던 스카프에 오로라 무늬를 보는 우리의 맘은 조금 특별했다. 이번 러시아 여행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난 다음에, 무르만스크에 가 오로라를 보겠다는 나의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내가 보고 싶어서 오로라 여행을 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면에는 그의 바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너를 위해 내가 갈게.'
북극권에 발을 디디던 날
북극권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무르만스크. 북극점과는 매우 먼 거리에 있지만 어쨌든 북극에 속하는 지역 아닌가. 북극은 현재 러시아의 세개 도시(무르만스크, 노릴스크, 보르쿠타)와 노르웨이(트롬쇠), 북아메리카 미국 알래스카 주(배로), 덴마크(그린란드)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 이번 여행은 북극점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첫 경험이 되는 셈이다. 무르만스크 공항 도착 10분 전, 5분 전.. 그리 크지 않은 비행기는 서서히 지면을 향해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다. 이번 비행은 다른 때보다 남달랐다. 랜딩이 매우 부드러웠다. 소프트랜딩. 기내에서는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기상과 활주로 노면이 완벽할 때 가능한 랜딩. 이번 비행은 그야말로 실크 랜딩이다. 느낌이 아주 좋았다.
* 러시아 무르만스크_Russia Murmansk
https://youtu.be/CZ1AcHU06H4
모스크바와는 달리 얼음같은 공기가 벼락같이 쏟아졌다. 알혼섬에서 느꼈던 추위가 다시금 떠오른다. 그때 입었던 착장 그대로이기 때문에 추위 걱정은 없다. 하지만 역시 오늘 밤까지 야외에서 오로라를 기다리기 위해서 핫팩이 필수다. 내 몸을 위해서가 아니다. 휴대폰과 카메라를 위해서다. 콧 속이 얼어 숨 쉴때마다 버석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는 전자기기에 표시되는 온도가 아니라도 알아챌 수 있다. 이 정도면 영하 25도다. 주머니속에 넣어둔 휴대폰을 다시 꼬옥 감싸쥐었다.
꿀잼허니잼일본여행
우리의 시작은 2000년 어느날, 인천의 한 미술학원. 나는 입시 미술학원 강사로 일하는 중이었고 너희는 풋풋한 고등학생이었어. 나이차이라고 해 봤자 3살, 4살이 어린 너희들. 어차피 사회에 나오면 누나동생할 터울이지만 우리는 선생님과 제자로 만났지. 지금 그렇게 얘기하기도 조금 쑥스러워. 우리는 모두 예상하지 못한 분야에서 나름대로 베테랑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너희들에게 '쌤'이고 너희들은 내게 '제자/동생'이다. 2016년, 우리가 정말 오랜만에 뭉쳤던 여행을 기억하겠지. 일본에서 오래 머물며 터를 잡은 T군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었지. 여러 날 우리는 함께 였고, 밤도 같이 지새웠어. 오키나와 츄라우미를 가고 싶다던 T군의 버킷리스트도 함께 달성했다. 그때부터였나봐. 누군가의 꿈을 함께 응원하기 위해 여행을 시작한 것이. 그때 만든 우리의 수다방, 꿀잼허니잼일본여행 톡방이었지. 우리는 알게 됐어. 함께 여행하는 것이 정말 즐겁다는 걸.
오로라 보러갈래?
너희들이 나와 함께 또다시 여행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주 놀랐어. 한국에서 일본에서처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고 굉장히 뜬금없는 여행지이긴 하잖아, 러시아가. 게다가 무르만스크 일정까지 너무나 간단하게 결정해버렸지. 무르만스크 일정을 처음 생각했을 때, 내 목표는 개 썰매 타기와 오로라 헌팅이었어. 함께 러시아 여행을 해 온 친구들이 모두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나 혼자만이라도 떠날 생각이었지. 국내선 비행기 가격은 생각보다 저렴했어. 매우 짧은 일정이지만 그 하루에 나는 모든 것을 걸었지. 그래서 더욱 위험할 수 있는 계획이었어.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잖아. 돈이고 시간이고. 오로라를 보지 못한다면, 모스크바에 그냥 남아있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 하지만 너희들은 모든 것을 믿고 나를 따라와 주었어. 아니, 함께 하기로 결정한거지. 각자의 운을 믿고.
그래서 나는 마음이 더욱 편하더라. 누군가와 함께 어디를 가기로 했을 때 가장 부담되는 것은 '나의 만족'와 '그들의 만족'이 과연 비슷할까하는 것이거든. 나는 어떤 식으로든 상관없지만, 그게 싫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탓할 생각이 전혀 없었지. 함께 방향을 결정하고 걸어나가는 것 자체가 즐겁고 의미있었으니까. 그래서 너희가 더욱 든든했어. 나를 지켜주는 수호 장군 같은 느낌이었지. 여행 동료끼리는 상성이 중요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운이나 기운이 합쳐져서 어떤 이벤트를 만들거든. 나는 너희들과 함께라서, 오로라를 보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니까.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어. 나와 함께 하기로 결정해주어서 참 고마워.
허세
나는 너희들에게 허세를 부렸어. 이르쿠츠크의 영하 28도나 알혼섬의 영하 40도를 들먹이면서 말이야. 하지만 정말 추웠어. 나는 그걸 있는 그대로 얘기한 것 뿐이고. 확실히 무르만스크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는 '덜'추웠거든. 물론 우리는 영하 30도 추위를 함께 경험했지만 말이야. 이미 '추위'라는 것을 제대로 경험했던 것 때문일까. 너희들이 코와 입을 완벽하게 막은 마스크를 쓸 때조차 나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어. 춥기는 엄청 추웠지. 그래도 휘항을 뒤집어 쓴 것만으로 꽤 괜찮았거든. 다들 손가락과 발가락이 시렵다는 것에는 동의하겠지만.
우리는 참 달라. 각자 하는 말이 다른 것을 눈치 챈 적 있어?
나:"한번 해볼까?"/잉태:"괜찮을 거에요."/T군: "괜찮지 않을까요?" 서로를 받아들이려 하는 모습이 좋아. 인정하는 자세가 맘에 들어. 마음 혹은 어떤 물품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우리 사이에는 끊임없는 역동이 오가는 중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야. 숙소 예약담당과 연락담당과 사진담당으로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뉜 우리들은 서로를 믿고 무르만스크에 도착해 이곳저곳을 걸어다녔지. 사람도 거의 없고 낯선 공간과 도시. 궁금한 것은 많은데 물어볼 사람도 없고, 숙소 주인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데다가 불친절하기까지 했어. 오로라 헌팅과 여행 정보를 얻으려던 계획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지. 레닌 쇄빙선이나 끊임없이 오가는 열차, 나뭇 가지 하나하나에 쌓인 눈과 생소한 건물들의 풍경들을 혼자 봤다면 조금 무서웠을 것 같아. 하지만 함께 걸어서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어. 어쩜 우리는 각자 나름대로 무섭지 않다는 허세를 부리고 있는 순간이었을까?
우리의 상성에 대해서 이미 얘기했지, 그랬기 때문에 우린 귀인을 만나게 됐지. 다들 기억할거야. 나는 우리의 운이 한데 모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믿어.
드미트리 아저씨
한국을 떠나오면서 러시아 여행 카페를 통해 예약했던 러시아인 S씨는 지나치게 높은 금액을 요구했다. 오로라만 4500루블, 개썰매까지 포함한 금액으로 거의 18만원을 요구했다. 모든 것을 감안하고 오로라만 볼 수 있다면...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방향을 틀었다. 무르만스크에 와서 직접 부딪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기대했던 숙소 주인은 우리에게 그 어떤 정보도 주려 하지 않았다. 인터넷 사이트를 직접 찾아보라고 하는 말을 번역기를 통해 보며 나는 많이 실망했다. 어쨌거나 짐을 두고 밖으로 나와 레닌 쇄빙선을 향해 걷다가, 정말 우연히 드미트리씨를 만나게 됐다.
아저씨는 털모자와 패딩, 장갑을 끼고 유모차를 흔들고 있었다. 그의 딸은 유모차 안에서 드미트리가 흔드는대로 리듬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말을 못하는 갓난아기로 우리가 안을 들여다보자 신기하다는 듯 눈을 맞췄다. 그는 무르만스크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여행자에게 도움을 주는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근방에 갈 만한 곳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물만난 고기처럼 눈을 빛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로라 헌팅이나 개썰매 등의 정보를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는 여행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러시아에서 이렇게나 영어에 능숙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드미트리는 우리에게 '귀인'이었다.
드미트리와 우리는 페이스북 아이디를 공유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 당장 예약을 하고 나중에 시간을 정하는 것이 어떤지 물었다. 그러나 그는 간결하고 여유있게 대답했다. '기다리면 돼. 이따 상황을 봐서,' 오로라를 보는 방법은 택시를 타고 가면 되니까. 내가 불러줄거야. 밤 열시 이후쯤에나 가능하겠지.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드미트리는 아무렇지 않게 '베풀고'있었다. 믿기지가 않아서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그냥 길가다 처음 보는 아시아 여행자들을 만나 뭔가 아는 척 하는 사람일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믿을 것이 그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근처를 한바퀴 휙 돌고, 추위를 참지 못해 들어간 미러볼 가득한 고급 식당에서 거하게 한 상 차려먹었다. 오후 6시쯤, 그대로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내가 찾아본 정보에 의하면 이곳 무르만스크 오로라 헌팅은 보통 밤 늦은 시간, 새벽 두세시쯤이다. 바로 어제 무르만스크에서 선명한 오로라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러시아 여행자가 있었다. 우리는 거의 밤을 새울 각오를 하고 미리 눈을 붙였다. 자는 둥 마는 둥 다시 일어난 시각은 11시 30분.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긴장 반 기대 반으로 침대에 일어나 앉았다. 서로 마주 보며 말했다. '드리트리 이 사람이 진짜 연락해 줄까?'
잉태가 아까 숙소에 돌아와서 페이스북 메세지를 보냈더니, 바쁘다며 이따 연락한다고 했단다. 조금 불안해졌다. 다시 메세지를 보내도 이렇다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한 내가 드미트리씨를 친구 추가 하고 말을 걸었다. 우리는 준비가 끝났고, 택시를 부탁한다는 말에 바로 반응이 왔다. 택시 번호와 함께, 기사가 가야할 위치까지 모두 전달하겠다는 반가운 말과 함께,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기꾼이 아니었어!!!'
영하 28도를 헤쳐
추웠어. 그리고 깜깜했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우리는 조금 긴장했지. 택시는 이미 도착해 있었고 서둘러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어. 우리는 12시에 숙소 체크아웃을 한 다음 짐을 모두 챙겼고, 택시에 올라 타면서 함께 얘기를 했잖아. '분명히 오로라를 볼 수 있을거야!' 택시 기사는 예상대로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어. 그래도 번역기를 한국어로 바꿔 보여주긴 하더라. 러시아에서 한국어 번역기로 한글을 보여준 첫번째 러시아인이었어. 그는 드미트리씨와 러시아어로 전화를 하더니 바로 차를 출발했고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우리 셋이라 두렵지 않았어.
택시를 타고 오로라 포인트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차창을 내렸다 올렸다 했잖아. 손가락이 시려워서 도저히 오래 열어둘 수 없었지. 그래도 우리는 보았어. 까만 하늘 위로 녹색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오로라다!
차는 빠르게 달렸고, 녹색 구름도 빠르게 이동했지.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열심히 카메라를 들이댔어. 이쯤되면 휴대폰 카메라는 별로 의미가 없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카메라로, 노출시간을 길게 잡고 찍는거야. 우리 중 T군이 가장 좋은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미러리스 번들 렌즈를, 잉태는 휴대폰을 쥐고 있었지. 달리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내가 눈으로 본 것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었어. 그건 T군도 마찬가지. 몇 번 포인트에서 택시가 갑자기 멈춰 섰지. 택시 기사는 우리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어. 안에 있던 우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차문을 열고 나와 사방을 둘러 보았지. 이상하게 오던 길에 봤던 것처럼 '오로라'같은 것은 보이지 않더라. 조금 실망스러웠어. 오래지 않아 차는 다시 문을 닫고 또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각자 기도했을 거야. 오로라야, 나타나라 제발! 택시는 40km를 넘어 달려나갈 것이라 했다.
숨은 조력자
첫번째 포인트를 지나 두번째 포인트로 가는 중, 우리는 몇 번이나 오로라를 보았어.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고보니 드미트리씨의 친구인 알렉스 얘기를 안할 수가 없네. 드미트리는 오로라 헌터인 알렉스에게 우리 얘기를 한 모양이더라. 택시에 태워 우리를 보낼 테니 기사와 만나 안내를 해주라고 전한 모양이더라. 정말 이쯤이면 드미트리씨는 귀인 맞지! 오로라 헌터라면 누구든 들르는 두번째 포인트에서 제대로 인사할 기회가 있었어. 그는 영어를 조금 사용할 줄 알고, 소통도 어느정도 됐지. 알렉스의 차에는 개인 손님으로 보이는 서양 여성이 탑승하고 있었어. 자기 손님을 챙기면서도 우리까지 신경써 주었던 것이 정말 고맙더라고. 이곳에서 알렉스와 연락처도 공유했지. 그는 무르만스크를 잘 이해하고 있는 따뜻한 사람이더라.
약 한 시간쯤 기다렸을까? 오로라는 매우 약하게 몇 번 지나갔어. 눈으로는 잘 안보이는데, 카메라를 들이대니 녹색 구름 같은 것이 찍히더라. 무슨 귀신도 아니고, 정말 신기하지 않아? 기온은 영하30도를 육박할 정도로 계속 떨어져 갔지. 오늘 오로라지수는 꽤 낮은 편이었고 확률도 10%밖에 되지 않았어. 그래도 점점 날씨가 추워지니 나는 조금 기대를 했고. 알렉스는 곧 마을로 돌아간다고 했어. 이 포인트에서 오로라를 보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더라.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오로라를 만나지 못한다면 오늘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알렉스의 차는 곧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어. T군은 못내 아쉬운지 파 밖에서 연신 사진을 찍어댔지. 어쩔 수 없나...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바람이 안타까움으로 바뀌려는 순간, 차창 밖으로 진한 녹색 구름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오로라였지!!
공항으로 출발하기 딱 10초전이었다고! 차 안에서도 확실히 보이는 오로라 형상은 신기하기만 했어. 손이 얼어붙는 것도 모르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지. 가뜩이나 셔터를 누른다고 카메라가 흔들리기 때문에 리모콘 기능까지 이용해야 했다고. 나의 사진은 화질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보라고! 이게 바로 오로라야. 아이슬란드라면 하늘 가득 선명한 오로라를 볼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오늘 이 정도 오로라를 만난 것만으로도 신이 났어.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나 주었잖아! 너를 위해서, 모스크바에서 여기까지 날아와 새벽까지 기다렸다고. R에게 너를 보여줄 수 있게 됐어!!! 우리는! 성공했다! 무르만스크에 온 목적을 달성했다! 모두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지. 정말 다행이야!
오로라는 우리의 기대에 화답이라도 하듯 천천히 흘러갔어. 너희 눈 속에 우리를 가득 담아 둬. 잊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일테니까. 마치 이런 이야기라도 들리는 것 같았지. 오로라는 천천히, 꾸물거리면서 우리 눈앞을 스쳐갔어. T군은 여러 장치를 이용해 녹색 빛을 담았지.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된 장비를 갖추고 와서 참 다행이야. 그때 감동을 지금 이렇게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다 그 덕분이라고. 어떤 사람의 꿈, 또 어떤 사람의 버킷 리스크를 달성한 순간이었어. 감격적이더라.
공항에서 9시간
오로라를 본 우리들은 지치는 것도 잊고 공항에 내렸지. 이때가 새벽 3시 30분 가량. 힘든 것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어. 목표를 달성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그런데 우리들의 운명은 7시 비행기를 타지 못한 것에서 조금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해. 이때까지만 해도 공항에서 9시간을 기다리게 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으니까. 예정대로라면 9시 즈음 모스크바에 도착해 여러 장소들을 둘러볼 계획이었잖아. 이제나, 저제나 비행기 시간표를 보며 탑승을 기다리던 우리는 할 것이 정말 없었어. 배가 고파 작은 간식을 사 먹기도 했지. 차도 마셨고, 기념품도 샀어. 의자에 앉아 있다가, 돌아다니가도 해 보고, 이해할 수 없는 표지판도 읽어보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대화할 상대도 찾았던 것 같아. 발견하지 못했지만. 돌아가며 화장실도 갔지. 어쩌면 러시아 여행 중 긴 시간을 머물며 제대로 영역표시를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네. 부끄럽지만!
고락을 함께 했다는 것은 이걸 두고 하는 말일 거야. 이전에도 그랬지만, 우리는 오늘 오로라를 봤고, 9시간 동안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렸어. 그래도 이렇게 즐거운 기억으로 여행기를 쓸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함께 있었기 때문일거야. 나는 벌써 우리들의 다음 여행이 기대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