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연속

뉴욕 중앙일보 주최 이민자 수기 공모 우수상

by Eric

뉴욕 중앙일보가 지난달 공모한 미주 한인 이민자들의 "나의 이민 수기" 공모전에 졸필임에도 불구하고, "삶은 열정의 연속"이란 글로 우수상을 받아 후원자인 한미은행 맨해튼 지점에서 지난주 시상식을 가졌습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인생의 "주연"이면서 다른 인생의 "조연" 역할을 맡고 있기에 자라는 자식에게 조금이나마 도전정신과 격려가 되고자 응모했는데, 덕분에 힘들어하는 가족들이 기뻐해서 저 역시 가족의 조연 역할을 나름 했다는 자부심에 그간 격려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86,400
바로 하루를 초로 환산한 이 숫자를 저는 제일 좋아하고 소중히 하고 있습니다. 삶의 최소 단위인 이 찰나의 "초"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서는 하루를 그리고 일 년과 평생의 삶을 결코 소중히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8년간의 객지 생활에 한번 더 "삶은 열정의 연속"을 마음에 되새시며 가을비 내리는 이 늦가을 출근길도 힘차게 달려봅니다. 그럼. 건강에 유의하시고 삶의 무게에 힘들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무대에 주연으로서 최선을 다해 연기해 나갑시다. 그것이 자기 인생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니.....

http://m.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5785863&referer=


-열정의 연속 -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8년, 뉴욕시에서 북으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고즈넉한 대학 캠퍼스에 만발이 휘날리던 연분홍의 벚꽃 잎을 맞으며 벤치에 앉아 있던 나는 ATM에서 뽑은 은행 잔액을 들여다보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두 달 전 학생비자로 꿈에 그리던 미국 땅을 밟았을 때만 해도 ESL 과정의 어학 연수생이라고는 하나, 수업도 열심히 듣고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캠퍼스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들고 온 만 불 중에 등록금과 기숙사비 등으로 2개월 만에 6천 불을 쓰다 보니, 통장에는 4천 불만 남았다. 다가올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 못 하면 어렵게 들어온 미국을 떠나야 하는 선택의 귀로에 서 있었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가당찮은 혈기만 품고 안일한 계획으로 왔기에 아는 사람 한 명 없었던 이 광활한 땅에서 가난한 유학생이 혼자 겪어야 했던 현실의 벽은 너무나도 혹독하고 높았다.

내가 5살 되던 해에 농부였던 아버지가 말기 암으로 세상을 떠는 바람에 어머니 혼자 7남매를 키워야 했던 가난한 집안 형편상, 원래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도 등록 마감일까지 결국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그날 저녁 울면서 찾아간 인적 없는 광안리 바닷가 방파제에 주저앉아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밤늦도록 검게 다가오는 파도만을 쳐다보며 몹쓸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철없이 가난을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든 또래 친구들처럼 대학을 가고 싶어 고심 끝에, 군대를 마치고 고졸 학력으로도 응시가 가능한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낮에는 부산 지방 병무청에서 근무하면서 밤에 야간대학을 갈 준비를 했었다.

그런데, 근무한 지 한 6개월쯤 되어서 일본서 신문 배달을 하면 숙식과 학비를 보조해 준다는 신문 구인광고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당시, 외국 유학이란 부유층 자녀들이나 국비유학생들의 전유물로만 여겼던 터라, 설령 가난해도 나만 열심히 하면 외국에서 유학할 수가 있다는 그 설렘에 며칠 밤잠을 설쳤던 기억은 지금도 새롭다. 때마침, 당시의 베스트셀러“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를 읽었던 터라 온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의 젊음을 건 무모한 도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록 23살의 나이에 동경으로 건너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신문을 돌리면서 대입 준비와 등록금을 모아야 했던 고된 나날들이었지만, 운 좋게도 4년 전액 장학금으로 대학교에 합격했던 그 날의 짜릿한 성취감은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수업이 늦게 끝나다 보니 신문 석간도 돌릴 수도 없게 되었고 숙식은 여전히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에 결국, 레스토랑 웨이터, 이삿짐센터 도우미, 여행 가이드 그리고 전시장 통역자 등등 닥치는 대로 틈틈이 일하면서 학부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하면서부터는 공부량이 더 많아져, 시험 기간에는 그런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차에 수소문 끝에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저렴한 호텔에 투숙해서 주는 약만 받아먹고 피나 소변 검사만 받으면서 시험공부할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젊음을 불태운 나의 7년간의 동경 유학 생활을 돌이켜 보니, 당시 같은 대학원에서 돈 걱정 없이 공부하는 한국 최고의 금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동갑내기 재벌 아들을 보면서 임상시험을 받기 위해 허겁지겁 도서관을 나와야 했던 나를 비교했을 때가 가장 자신이 비참해 보이고 참기 힘들었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24시간과 숨 쉴 공기를 공짜로 줬다는 감사함을 새삼 깨달으며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다.

아무튼, 석사 논문을 준비하는 동안에 조금씩 욕심이 생겨 이왕 외국에 나왔으니 마음속으로 늘 세계 금융의 메카인 뉴욕에서 꼭 일해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다는 절박한 생각에 매달 방세를 걱정해야 했던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조금씩 저축해 미국 유학의 종잣돈으로 만 불을 모아 유학생 비자를 받고 미국에 건너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금쪽같이 가져온 돈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반도 채 남지 않았고 뉴욕 대도시가 아닌 근교라서 생활비도 적게 들 거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왔지만, 오히려 차 없이는 당장 캠퍼스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을 정도라, 어떻게 아르바이트를 하면 그럭저럭 견딜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환상은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렇다고 힘들게 태평양을 건너왔는데 여기서 절대 포기할 수는 없어 고심 끝에 뉴욕 Queens에 한 달 350불짜리 조그마한 3층 다락방으로 이사를 하고 맨해튼에서 제일 저렴한 ESL 학교로 전학을 했다. 그리고 학교가 끝나면 집 근처의 교민이 운영하는 델리 가게와 세탁소에서 파트타임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평일에는 6시간 그리고 주말이면 아침 6시에 일하러 나가 저녁 12시 넘어서 집으로 돌아오니 꼬박 하루 18시간 넘게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일을 마치고 허기진 배를 샌드위치로 채워 가면서 집으로 향할 때면 다리가 풀려 나도 모르게 얼은 주택가 계단에 주저앉아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얼어 죽을 뻔할 때도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체중이 점점 빠지고 몸에 수시로 생기는 피부병으로 고생을 해 병원에 가보니, 피곤할 때면 면역력 조절 능력이 더 떨어져 생기는 병이라며 몸에 무리를 주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다. 순간, 일본에서의 임상시험에 바보같이 계속 몸을 맡겼던 것이 결과적으로 면역체계를 망쳤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생활을 하다 보니 영어가 생각보다 잘 늘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과 돈을 아끼며 영어를 배우려고 광고지에 나오는 Toll Free로 전화를 걸어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어설픈 영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인근 노인 아파트에 사는 미국 노인들을 근처 몰에 데리고 가 물건 사는 것을 도와주면서 영어를 배우기도 하고, 밤새 국영 NPR 라디오 뉴스를 틀어 놓고 잠을 자기도 했던 기억은 얼마나 문법 구조가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게 어려운 것 인가를 새삼 느끼게 했다.

하지만, 이런 고달픈 생각이 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때마다 다락방 창문 너머 아련히 비쳐오던 맨해튼의 고층빌딩의 불빛을 쳐다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꼭 저런 곳의 높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상상을 하면서 곤한 잠을 보채곤 했다. 하지만, 막연한 바램은 욕심에 지나지 않고 자신이 품어 온 꿈을 이룰 수 없는 법. 시간이 아까워 Wall Street Journal을 사서 전철 안에서 피곤한 눈을 비벼가며 읽다가 조는 바람에 종점까지 가기도 일수였고, 영어 단어가 적힌 수첩을 호주머니에 넣고 드랍샵에서 주인 몰래 일하면서 보다가 쫓겨날 뻔도 했었다.

86,400, 이것은 내가 좋아해 기억하고 있는 숫자이다.
바로 하루 24시간을 초로 환산했을 때의 숫자이며 이 1초는 우리 삶의 최소 단위를 이루는 찰나이다. 이 찰나를 젊은 나이에 더더욱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 하루와 한 해를 소중히 할 수 없으며 나아가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가꾸어 갈 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다듬질했다.

그런 내 나름의 시간 관리 덕분이었는지, 결국 미국에 온 지 2년 후, 맨해튼의 헤드 헌트를 통해 금융회사를 소개받았고 6번이나 되는 인터뷰 끝에 그 회사의 애널리스트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생의 첫 퇴근길은 엄청나게 추웠던 성탄절 일주일 전이였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고생이 헛되지 않았음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는지 어둡게 얼어붙은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한없이 감사의 눈시울을 적셨던 기억은 아직도 내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 원어민이 아닌 내가 분초를 다투는 회사 업무에서 영어를 완벽히 소화해 낼 수가 없었기에 원래 정규 근무시간은 아침 8시부터지만, 남들보다 2시간 일찍 출근해, 그 날 업무를 미리 숙지했고, 근무 중에 이해하지 못한 업무는 밤늦게까지 파악하느라 늦게까지 남다 보니, 결국 회사 HR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근무하지 말라는 경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지금도 새로 들어오는 부서 신입사원이나 인턴들에게 매일 출근을 할 때마다 직장을 단순히 돈을 버는 곳으로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지니지 못한 보물을 열심히 찾기 위해 오늘 하루도 보물섬 상륙했다고 생각하라고 끊임없이 주문하고 있다.

바삐 살다 보니 올해로 외국 생활 27년째. 어느덧 한국에서 살았던 날보다 외국에서 살았던 해가 더 많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삶은 열정의 연속”이란 말이 내 삶의 모토가 되었다. 스스로 돌이켜 보면 한국의 가난한 시골 분교를 다녔던 코흘리개가 중년의 나이에 뉴욕의 금융 회사에서 월가의 애널리스트들을 트레이닝시키는 일을 하는 것을 지켜본 한국의 친구들은 나를 보고 성공적인 이민 생활을 하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남에게 내세울 만큼의 경제적 성공을 이루지도, 회사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지도, 미국 사회에서 큰 명성을 얻지도 못했다. 솔직히 미국 교민들 사회에서 취미 삼아 주말에 그 흔한 골프 한번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쳐보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나의 유대인 직장동료는 맨해튼에서 수많은 이민자 중 24시간 영업을 하는 민족은 한국 사람들밖에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얼핏 그만큼 근면하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으니, 역으로 말하면 악착같이 돈만 벌고 남을 위해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애 둘려 말했던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서인지 몰라도 나는 내 인생의 10%를 남을 위해 봉사하겠노라고 맹세를 한 이후, 요즘도 퇴근 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주민들에게 자원봉사로 일본어나 중국어 혹은 스페인어를 부족하나마 가르쳐 주고 있으며, 시간이 허락되는 한 토요일 아침이면 고등학생 딸과 함께 맨해튼의 노숙자들에게 브런치를 대접하고 말동무가 되어 주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정체성을 위해 Palisades Park의 종군 위안부 동상, 한국전 참전 기념비, 영화 “국제시장”으로 유명해진 뉴저지 북부 뉴톤 수도원, 그리고, 총기참사가 있었던 커네티컷의 Sandy Hook 학교, 또 매년 미국 밖으로 데리고 나가 한국의 포로수용소가 있던 거제도, 일본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해군본부, 콜롬비아에서 현지 노숙자를 돌보고 있는 한국 수녀님을 방문해 돕는 등 꾸준히 아이들과 함께 미력하나마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할려고 하고 있다.

몸이 힘들 때면 어김없이 약속이라도 한 듯 생기는 이미 나의 삶의 훈장이 되어 버린 피부병. 당시에 일본에서 신약 개발의 임상시험 대상이란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것을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에게도 걱정하실까 봐 차마 알리지 못했고, 사실은 결혼 후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자존심 때문에 나만의 암울한 과거를 털어놓지 못해 혼자 마음속에 담아왔던 나만의 비밀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작은 삶의 이야기가 이민 생활이나 유학 생활 가운데 견디기 어려운 고난이 닥쳐와 삶의 무게에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용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단 하루를 살아도 절대로 “영혼” 없이 살지 말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 그리고 인생무대에 주연인 우리 스스로가 식지 않는 "열정"을 가지고 훌륭한 자신의 삶의 연기를 펼칠 때에야 비로소 남의 삶의 무대의 조연 역할 또한 훌륭히 감당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나의 부족한 이민 수기를 통해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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