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ric Apr 24. 2018

가을에 남기고 떠난 사랑

숨겨준 고마운 분들에 대한 감사

매주 금요일 아침이 쓰레기 수거일이라 주로 목요일 저녁녘에 간단한 집안 정리를 하는데, 지난 주는 차고를 정리하다 작곡가이자 섹스폰 연주가로 알려진 길옥윤의 섹스폰 컬렉션이란 CD를 먼지 싸인 상자에서 발견했다. 

아마도 20여 년 전 그가 동경서 세상을 떠났을 즈음에 구입한 게 아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뜻밖의 반가운 발견에 CD 플레이어가 있는 차 안에서 "이별", "사랑하는 마리아", "서울의 찬가" 등 주옥같은 곡들을 차 밖은 제법 굵은 빗줄기와 바람이 부는 늦은 밤 시간에 들었다.

만인의 사랑을 받고 2013년 은퇴한 전설적인 가수 패티김.
그 패티김이 은퇴하기 훨씬 전인 10여 년 전, 미북동부 지역을 순회한 패티김 쇼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세련된 무대 매너와 당시 나이 60이 넘었다고 볼 수 없는 가창력으로 관중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고, 제법 음악 티켓 치고는 비싸다는 아내의 볼멘소리에도 불구하고 말 그대로 쑈 다운 쑈를 보고 왔던 기억이 난다.

거의 3시간에 간에 걸친 공연 끝나갈 무렵, 그녀는 무대 뒤에서 오늘의 공연을 위해 고생하신 여러분께 감사한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은 것을 보면서 역시 대단한 가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녀의 당시 신발까지 벗어가는 퍼포먼스를 보이며 열창했던 모습을 떠올리니, 머릿속을 스쳐 가는 일화가 떠올라 적어 본다.

중세 로마제국 시절, 파이프 오르간의 제일인자가 있었다. 그는 전국의 성당을 돌며,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했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하루는 어느 시골 성당에서 그를 초대했다는 소식이 그 마을에 퍼졌다. 하루라도 빨리 그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듣고 싶어 했던 그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그날은 왔고, 그가 무대 위에 서자,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볼까 말까 한 그의 영혼을 빼앗는 연주에 많은 기대를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주는 형편없이 끝났고, 사람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연주자인 그도 자신의 형편없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놀라 연주가 끝난 후, 화를 내며 무대 뒤로 달려갔다. 왜냐하면, 오늘의 자동식과는 달리, 당시의 파이프 오르간은 연주자가 연주하는 동안 무대 뒤에서 끊임없이 입으로 파이프에 바람을 불어 주는 사람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그는 그가 고용한 노인을 문책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수 십 년간 그와 함께 동행했던 그 노인은 없고 어느 젊은 청년이 그 노인을 대신해서 파이프 오르간에 입으로 바람을 넣었던 것이었다.

그는 너무나 화가 치밀어 "그 노인이 어디 갔길래, 네가 부느냐"라고 묻자, 그 젊은이는 "그 사람은 어젯밤 숙환으로 숨을 거두었답니다. 죽으면서 그 노인이 행여 당신이 걱정해 오늘 연주를 망칠까 봐 연주가 끝나기 전까지는 자기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해서 그의 죽음을 숨겼답니다." 그러자 그 연주자는 그제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항상 자기 자신은 무대 앞에서 관중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고 갖은 명성과 유명을 얻으면서도 실지로 오늘의 자기 자신이 있기까지 묵묵히 아무도 봐주는 이 없는 무대 뒤에서 수십 년간 파이프 오르간에 입으로 가감을 조절하며 혼신의 힘으로 파이프 바람을 넣어 주었던 그 노인의 노고는 물론이거니와 병들었던 것조차 잊고 있었으니...

실지로 그 연주자의 연주가 대단한 게 아니라, 그 무대 뒤에 있었던 그 노인이 대단했던 것을 당시의 관중들도 몰랐던 것 같다.

과수원 사과가 붉게 익기까지의 농부의 땀 흘림.
보채는 아이가 새록새록 잠들기까지 엄마의 산고.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있기까지의 가을 햇살.
.....

날이 차가워져 갈수록 오곡백과가 결실을 맺어가는 이 가을 녘에, 지금 내 뒤에서 돌봐 주고 걱정해 주었던 그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려 보는 것, 그래서 자신에게 교만하지 않게 하는 조그마한 나만의 가을 사색에 한 번쯤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아마 당시의 패티김도 서로 헤어졌지만 전 남편인 길옥윤의 돌봄과 그가 남긴 곡들을 무대에서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하면서, "가을에 남기고 떠난 사랑"이란 애잔한 섹스폰 연주를 끝으로 차에서 나와, 나는 이 가을에 남기고 싶은 감사는 무엇인지 이불속에서 생각하다 잠이 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