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과 인공위성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역사

by Eric

요즘 한국에서 "병자호란"이란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는데 실패했다는 소식에 다시 한번 지난 과거의 일이 떠올려진다.

때는 1996년 초여름.
하루는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을 향하는데, 당시 법대 대학원생이었던 나고야 출신의 타케다(武田)라는 친구가 지금의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센터(JAXA)의 전신인 일본 우주개발사업단의 2명의 행정지원 요원을 뽑는 최종 면접시험에 자신이 남게 되었다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달려와서 말을 건넸다. 그 친구는 당시 재학 중 이미 행정 고시에서 쓴맛을 보자 마음을 접고 당시로서는 생소한 항공우주법으로 분야를 바꾸면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그에게는 무엇보다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당시, 나는 쥐뿔도 없는 알량한 지식으로 대기권 밖의 타국 인공위성끼리 충돌하면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지, 자국 영토가 아닌데서 함부로 고정밀 촬영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등등 그와 흥미롭게 애기를 주고받은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천운이 따르지 않았는지 안타깝게도 그는 최종적으로 선택되지 못했지만, 만일 그가 근무를 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JAXA의 우주센터가 위치한 규슈(九州) 지방의 최남단 가고시마(鹿児島) 현의 타네가시마(種子島)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섬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불행을 몰고 온 임진왜란의 전조를 가져왔던 섬이기도 하다. 이야기인 즉, 1543년 중국 상선이 태풍으로 타네가시마까지 표류하게 되고, 그 배에 타고 있던 포르투칼인이 소지하고 있던 화승총을 그 섬의 도주(島主)가 2정 구입한 것이 계기로 본격적으로 조총이 일본에 전래되었다.

역사학자인 명지대 한명기 교수에 의하면, 그 당시 다이묘(大名)들이 난립하며 전국시대(戦国時代)를 겪고 있던 일본 무사들에게 지금까지의 무기였던 창과 칼 대신에 "조총"이라는 엄청난 화력의 이 신무기가 전해져, 당시 전국적으로 철강의 제련 기술이 발달하고, 은광 개발로 막강한 재력을 가진 일본 막부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는 명나라의 쇄약을 노리며, 명을 치기 위해 우리에게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며 다량의 조총 생산으로 침략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할 수 있게 하는 만드는 끔찍한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한다.

7년간의 임란 후, 전쟁의 참화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당시 전쟁 총책임자였던 류성룡은 요즘 한국에서 드라마로 유행한다는 "징비록"이란 책을 남겼지만, 전란이 끝난 후, 위기의식도 이미 사라져 버렸고, 뼈아픈 반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또 다시 40년 후에 발생한 청의 침입으로 발생한 병자호란으로 60만 이상의 조선의 양민들이 중국 심양의 노예 시장에 끌려가 만주족의 노비로 팔리는 수모를 겪었다.

그런데, 1712년 조선 통신사가 일본을 건너갔을 때, 역사를 잊지 말자고 류성룡이 후대를 위해 적어 놓았던 그 징비록이 조선에서 유출되어 오오사카의 난전에서 인쇄돼 버졌이 팔리고 있었고, 일본의 유식자들이 이 책을 바탕으로 조선을 연구하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당시의 통신사의 행적을 서술한 기행서는 전하고 있다.

때는 다시 흘러 300여 년이 지난 2012년 5월에 또다시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우리의 인공위성 "아리랑 3호"를 대기권 밖으로 밀어 올려 줄 자체 발사체 기술이 없는 한국이 타네가시마의 우주센터에 있는 미츠비시 중공업의 위성 발사체인 V-IIX를 빌려 우주로 올려졌는데, 왠지 그 당시의 조총이란 신무기와 오늘날의 인공위성이란 신기술이 400여 년이 훨씬 지났어도 양국 간 기술의 격차가 오묘히 오버랩되고 있다.

4년 전인 2013년 7월 28일 잠실 종합 운동장.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의 한일전에서 우리나라의 붉은 악마가 갑자기 엄청난 크기의 플랭카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글귀를 내걸자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히고, 일본 축구 협회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플랭카드가 걸린 잠실 운동장에서 5킬로도 채 안 되는 양재동에는 25살의 꽃다운 젊은 나이로 중국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을 감행해 자신의 삶을 조국을 위해 바친 매헌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의 유족들이 목숨 걸고 간직해 왔던 그의 귀한 유품들이며 각종 전시물들이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습기가 차 친필서에 곰팡이가 피고 탈색되어 가고 있다는 가슴 아픈 뉴스가 흘러나왔다.

그 아픈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봄 한국에 들렀을 때, 처음으로 양재동 매헌기념관을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뉴스대로 지붕이며 벽 외관은 페인트가 벗겨진 채로, 나의 안내를 맡은 분은 월 50만 원에 기념관 안내를 비번으로 돌아가며 맡고 있다고 했다.

오늘날의 국제무대에서 그 나라의 외교력은 국력에 비례하고, 그 국력은 한 국가의 탄탄한 경제력과 과학 기술력에 기초한다면, 광복 후 폐허가 된 이 나라를 이 만큼이나 잘 살게 했으면 됐다는 순간의 자만이, 오히려 독이 되어 아르헨티나나 멕시코처럼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될지, 아니면 스위스나 이스라엘처럼 작지만 강한 나라로 만들어 나갈지를 가르는 귀로에 서 있다고 인식하고, 언제든지 우리를 치고 올라 올 나라들을 경계해야 하고, 지나 온 우리의 과거를 스스로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거의 매년 노벨상을 타는 일본인들의 이야기를 또 접하면서 딸에게 노벨문학상을 탄 영국계 일본인 이시쿠라의 책을 읽힐까 하는데, 내 딸부터라도 무조건 반일(反日)이란 눈가리개를 접고, 지일(知日)이란 열린 마음으로, 극일(克日)의 길이 어떤 것인지 냉철히 찾을 수 있는, 그래서 류성룡의 징비록의 새겨져 있는 징비의 정신을 언젠가는 되새겨 보는 것이 나의 과욕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아직도 매헌기념관 허름한 벽 한켯에 윤봉길 의사의 아내 배용순 여사가 배틀을 짜는 사이 윤의사가 일본에서 총살형을 당했다고 전해 듣자, "남자가 할 일을 다하고 죽은 것이 무엇이 슬프냐?" 라며 담담히 배틀을 짰다는 글귀가 적힌 사진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역사는 과거 완료형으로 끝나서는 절대 안 되며, 미래 진행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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