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떠난 그 세상
애들도 아내도 다 잠들고, 냉장고 모터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만 간혈적으로 들리는 이 시간. 추운 겨우내 미뤄뒀던 집안 페인트를 애들 봄방학 전까지 다 매듭지을 요랑으로 칠한다고 몇 시간을 벽만 바라보다 몇 시인가 봤더니만 시간은 벌써 자정을 향해 숨 가쁘게 내달리고 있다.
한 달 전 둥근 겨울 달이 휘영청 창 너머 숲 속 나뭇가지 사이에서 어른거리면서 찬 겨울바람을 이겨 내더니만, 반쪽이었던 그 녀석이 점점 달이 차오르면서 다시 밝은 정월 대보름 달이 되어 지난겨울이 남기고 간 싸늘한 밤하늘을 가냘프게 지키고 있는 걸 보니 또 2주가 훌쩍 지난 게다.
5년에 한 번씩 칠하고 있는 집안 페인트칠은 말 그대로 손이 많이 가는 힘든 작업이다. 방마다 층마다 색깔을 고르고 나서는 가구, 카펫, 액자, 커튼, 벽시계 등 모든 것을 벽에서 하나하나 떼어 놓고, 그다음에 먼지 싸인 벽과 창틀을 닦고, 페인트가 안 묻게 테이프로 문지방 바닥에 붙이고......
벌써 2주째 퇴근 후 저녁 먹고 밤 시간을 이용해서 페인트 작업을 하다 보니, 이제 슬슬 지겹고 진절머리가 날 법도 한데, 묘하게도 이 작업은 다른 가삿일 보다 재미가 솔솔 있다. 한국에 있는 어느 동창 친구가, 시공업체 같은 데다 시키면 빨리 끝날 거라고 말했지만, 여긴 가정집에서 시공업체 시키는 건 어려운 배관공사나 워험한 전기공사 이외에는 집주인이 하는 분위기라 자연스레 집 손보는 일은 가장인 나의 몫이 된다.
딸내미 키 잰다고 벽면에 세워 두고 이번 달에는 얼마나 컸나 연필로 딸 머리끝에 맞춰 벽에 금을 따박따박 새겨 놓았던 걸 본다 든 지, 아들이 어릴 때 벽을 도화지 삼아 색연필로 낙서한 그림이며 글 쓴 것을 본다 든 지 하면, 문뜩 애들의 어릴 적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이런 때도 있었구나 하며 피~식 웃고 하얀 프라이머 페인트로 추억을 덥듯 칠해 버린다.
페인트 작업의 재미는 내가 얼마만큼 꼼꼼하게 하냐에 따라 어떤 색이 나오냐 하는 것도 그렇치만, 무엇보다 손 때가 묻었거나 구멍 파인 곳을 컴파운드로 메꾸고 그곳을 덥고 붓으로 한결 두결 칠해가면, 내 몸에 끼인 찌든 때를 밀어 버린 것처럼 개운하고, 또 부데키며 살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만들어진 주름진 마음을 펴는 것 같아 마음이 마냥 가볍고 편하다. 아무리 더럽고 지저분한 곳이라도 페인트가 지나가는 그 자리는 영락없이 깨끗해지고 만다.
그런데, 집안 대부분을 다 칠하고, 지하실만 칠하면 거의 공사가 끝나는 순간, 보일러실 옆 벽에 엉성해 잘못 박힌 못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 내가 한 못질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인데 왜 이런 곳에 이런 못이.....
순간 6년 전 3번째로 집을 다니려 오셨던 어머니 생각이 확 뇌리를 스친다. 며칠을 밤늦게까지 페인트 통 날라 주시고 신문지로 바닥 깔아 주시던 그때에 어머니는 아들이 실수로 박지 못한 그곳을 어설프게 못질을 하신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가난한 시골 농사꾼이었던 아버지가 위암 말기로 1년을 버티다 결국 내가 5살 때 돌아가시면서, 어머니는 45살의 중년의 나이에 졸지에 7남매를 책임져야 할 가장이 되어 버리자, 남들에게서 당신이 과부라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아비 없이 자란 못 배운 자식이란 소리는 하늘이 무너져도 듣기 싫다며, 엄하게도 우리 형제들을 홀몸으로 키워 놓고 84세에 오랫동안 힘겨히 버텨온 지병을 끝내 못 이기고 재작년에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손 때 묻은 그 못을 빼내고 못 자국을 메꾸니, 그 모진 세월 굴곡으로 주름진 당신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아얀 페인트로 칠하면 모든 것이 말끔히 그리고 깨끗이 지워지건만, 이 못난 아들의 당신에 대한 그리움은 아무리 지우고 또 지우려고 해도 오히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불사조 마냥, 달포마다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내 마음속에 고요히 떠오른다.
살아생전 재미난 여행 하시라 돈 좀 더 보내 드릴 걸... 이렇게 가실 거면 전화 문안 더 자주 할 걸... 하면서도 타국에 산다는 이런저런 핑계로 게을리했던 못난 불효자라 생각하니, 이내 막바지에 접어든 이 페인트질도 힘이 쭉 빠져 주져 앉으면서, 나도 모르게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작은 눈물 방울이 페인트 통에 툭 빠져 버린다.
홀몸으로 자식들 키우면서 당신의 두 눈에서 흘린 눈물을 모았다면 섬진강 줄기를 이뤘을 것이고, 당신의 마른입에서 내뱉은 한숨을 쌓았다면 내 고향 지리산만큼이나 높았을지 모르겠다. 문득, 당신께서 살아생전 즐겨 시청하셨다던 가요 무대에서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이 나올 때면 이역만리에 있는 이 아들이 그리워 따라 부르셨다던데, 갑자기 이 밤따라 유달리 듣고 싶어 진다.
당신이 유독 그리운 이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