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30일.
올해의 마지막 출근이다. 사실 연차가 남아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집에서 쉬고 있지만, 이도 직업병인지 너무 집에서만 방콕하고 있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아직 올해에 남겨 놓은 일은 없나 사무실 파일들은 다 제대로 정리를 해 놨는지 등등 노파심에 새벽부터 자진 출근을 했다.
날씨가 흐려 눈이라도 덥힌 세모(歲暮)를 보내려나 하여 창밖을 보니, 빗방울이 유리창에 드문드문 소리 없이 맺혀 오고 있다. 문득, 사무실 남북으로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두 광경이 눈에 띈다.
남으로는 삭막한 마천루 밑으로 쇼핑하려 쏟아져 나온 사람들과 차량들이 분주히 비에 젖은 도로를 달리지만, 눈을 돌려 북으로는 이 섬 끝자락에 위치한 빈민가 할렘(Harlem)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족히 100여 년이 넘은 오랜 건물들에 싸인 센트럴 파크 (Central Park, 여의도 면적의 약 1.2배)가 적막에 싸인듯 이 이틀 남은 연말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다.
돌이켜 보니, 늘 지근거리에 있는 이 도시의 거대한 공원임에도 봄내음 푸르른 잔디를 밟은 적도, 더운 여름날 소낙비를 피하면서 우산 쓰고 빗속을 거닌 적도, 마음 놓고 가을 낙엽을 바스러지게 밟은 적도, 눈 내린 공원 산책로를 발자국 남기며 거닐어 보는 망중한(忙中閑)을 즐겨 본 기억이 올해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어디 그것뿐인가?
한 지붕 아래 살면서도 사춘기에 접어든 딸 아들 한 번 더 안아 줬어야 했는데, 내 박봉으로 힘든 살림 사는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건넸어야 했는데, 세월을 같이 힘겹게 헤쳐온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 한번 더 했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들이 늘 연말의 끝자락인 이맘 때면 연례행사처럼 밀려온다.
170여 년 전인 1840년대에 조성되기 시작했다는 이 센트럴 파크. 이 공원 내에 심겨진 느릅나무만 2만 6천여 그루가 있고, 민간요법으로 이 느릅나무잎을 달여 마시면 천연 수면제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럼, 삶의 수면제가 바쁜 일상으로부터의 이탈이고, 가쁜 삶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일 진데, 처자식 먹여 살려야 하는 월급쟁이인 나로서는 그리 쉬운 선택은 아니지만, 밝아오는 새해에는 더욱더 주위를 돌아보는 여유를 갖고, 내년 녹음이 짙게 어우러 질 유월쯤에는 가족들이랑 이 아름드리 하늘을 보고 서 있는 느릅나무 가로수길을 거닐며 자연을 만끽하면서 올해보다는 그래도 더 값진 한 해가 되길 이 세모에 바랄 뿐이다.
언젠가 우리 아이들도 느릅나무의 넉넉함이 열린 푸른 가지 아래를 손자 손녀들 데리고 손잡고 같은 이 가로수길을 거닐 그 먼 훗날을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