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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Apr 24. 2018

인생의 11월이 다가오면

생의 마감을 끊임없이 준비하는 것....

세상의 많은 직업 중에 계절별로 아니면 요일별로 바쁜 정도가  다르다. 그럼, 일반 자연을 상대로 하는 많은 직업 중에 정원사는 언제가 제일 바쁠까?

다름 아닌 11월이다. 초봄부터 늦가을까지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켜줬던 꽃이나 과실수이지만, 꽃이 지고 열매도 떨어지고 낙엽마져 떨어진 11월이 정원사에게 아무 할 일이 없을 듯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인기 있는 식당이 설령 아침에 문을 닫았어도 주인이 새벽 일찍 일어나 그 날 찾아 올 손님을 위해 좋은 식자재를 구하러 농수산물 시장 곳곳을 분주히 찾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식물들도 꽃잎 떨어지고 낙엽이 져 자연의 휴식을 취할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쉬지 않고 무한히 다음 계절을 위해 끊임없는 행진을 묵묵히 계속한다.

단지 싹을 틔우지 않고 땅 밑에서 종족을 번식시키거나 낙엽을 거름 삼아 영양분을 흡수한다. 마치, 바로 식당 주인이 장바구니에 한아름 가득 맛깔스럽고 싱싱한 해산물들과 채소를 한가득 담아 가게는 것처럼....

하여, 이들 정원사들에게는 다가올 봄의 전령들이 피울 꽃들을 마음속에 그리며, 구근을 추운 겨울이 와 땅이 얼어 버리기 전에 심어야 하고, 어떤 구근을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연구해야 하며, 또 올해 무성히 자란 나뭇가지들에 가지치기를 미리 해 둬야 겨울 사이에 그 끝이 마른 가지로는 영양분을 더는 공급하지 않고 다른 가지로 공급해 자신의 나무를 스스로 잘 가꿀 수 있는 꼬를 터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추위에 약한 구근들은 그 마른 줄기를 힌트로  땅에 묻힌 구근을 찾아내 햇볕에 건조했다가 통풍이 잘 되는 서늘한 곳에 보관해서 이른 초봄에 다시 심어야 겨우내 심한 추워에 얼지 않고 버틸 수가 있다.

그리고, 거름을 제대로 해서 땅을 덮어주고 낙엽은 다 치우지 말고 잘 덮어 둬야 땅속의 뿌리들은 땅속 벌레들이 내뱉은 분비물을 영양분으로 해서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낙엽이 지고 봄이 올 때까지 꽃과 나무들은 추위를 핑계 삼아 겨울잠 자듯 휴식을 취한다는 식의 가르침은 엄격히 틀린 말이다. 다만 형식을 갖추지 않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언정, 이들이 생명을 얻고 나서부터 그 수명이 다할 때까지 쉬는 법은 없다.

내가 얼듯 소일거리로 보일 수 있는, 하찮아 보이는 이 꽃과 나무 그리고 정원 일을 취미로 하면서 일상에서 얻지 못하는 삶의 교훈을 말없는 자연이 전하는 현상에서 그리고 그들의 표정에서 읽어내는 작업. 이것은 가히 명문대학에서의 명강의에서도 들을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기에 희열을 느낀다. 보고 즐기는 시각적 美에 더해, 알아감의 보람, 깨우침의 기쁨, 그리고 이런 깨달음을 삶의 적용함으로써 생기는 반성......

오늘 저녁녘에 조깅을 하면서 늦가을인데도 밤색깔을 한 애벌레가 꼬물꼬물 낙엽 달린 나뭇가지를 타며 석양 덥힌 가을 하늘을 향해 기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뛰는 운동이라 폰을 들고 가지 않아 이 녀석을 사진에 담지는 못했, 그의 온몸을 틀고 한 발짝식 나아가는 몸부림에서 행여 우리도 삶의 무게로 힘들어질 때라도 뒷걸음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큰 삶의 지혜를 이 손가락 반도 안 되는 애벌레에게서 잔잔히 얻어 낼 수 있다.

11월도 어느덧 1주일이 지난 오늘.
이 계절이 자연 만물에게 제일 바빠야 하듯이 나이를 거듭할수록 우리 인생의 농익은 11월이 조용히 다가오면, 내가 떠나더라도 그 자리를 채울 다음 세대를 위해서 이 나이에 내가 분주해야 할 좋은 명분이 여기에 있으며,  이해타산에 찌들고 갈등 많은 세상사에서 귀히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은 이 자연이야 말로 우리의 삶을 일깨우는 고마운 스승인 셈이다.

마른 고사리 잎과 도토리 나뭇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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