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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Apr 24. 2018

그러려니

지난주 허리케인이 북동부 연안을 스쳐갈 때, 혹시 바람에 떨어진 열매는 없나 싶어 늘 가던 산책길이 좁다란 하지만 넉넉히 굽어진 산길을 걷다 " 모감주나무"를 발견했다.

열매가 익어 떨어지기엔 좀 이른 시기인지라 그 거센 비바람에도 아랑곳 않고 나뭇가지에 끈질기게 달라붙은 것을 따서 물기를 말리고, 집에 있은 나무통으로 된 화병에 노란 다얄리아 두 송이와 매치시켜 보았다.

모감주나무의 열매는 원래 열매가 단단해 옛 선인(先人)들은 잘 말려서 염주로 사용했다 한다. 그런데 재미난 게 가령 호두나무나 밤나무 등의 그 열매는 엄청 껍질이 단단하거나 거친 반면, 이 모감주나무의 열매 껍질은 종이 접이용 제지의 두께보다 얇고 가볍다.

또한 껍질의 형태가 둥글지도 모나지도 않고 삼각형인데 이는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만 불어주면 어디든지 날아갈 수 있는 열매도 아니고, 그렇다고 밤나무나 도토리처럼 제 무게로 못 이겨 제자리를 지켜야 할 필요도 없이, 어중간히 바람에 불면 껍질이 가볍고 속이 넉넉히 빈 열매인지라 땅 위로 떨어지면 둥글지 않은 연유로 어느 정도 뒹글다 걸리기 쉬워 열매로 어느 정도 거리까지 산포해 군락을 이룰 수 있다.

이걸 보면서, 우리네 인생이 자꾸 연상된다.
모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리 가볍지도 않은, 그러나 겉보기에는 종이짝보다 연약할 지라도 그 열매는 무쇠보다 단단해 그 열매를 꾀어 염주로 쓰이니, 외유내강(外柔內剛)의 고매한 기품을 간직한 채, 자신의 열매를 염주로 내어주어 뭇 많은 소망을 비는 구도자(求道者)와 기복을 갈구하는 이의 손바닥을 영글게 만드어 주니, 이 모감주나무 열매야말로 우리의 생사고락을 잘 표현하는 영물인 게다...

살다 보면 살을 서로 맞댄 부부인들 마음 통하지 못할 때도 있고, 내 속 앓아 낳은 자식도 내 마음과 달리 자라는 게 우리네 삶이니, 이런저런 인생사에서의 사는 게 그러려니, 만남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겨가다 보면 삶을 달관한 산사(山寺)의 주지승 마냥, 천국의 지름길을 예비해 놓은 성당의 신부님 마냥, 구름에 달 가듯 가는 그런 인생....

한 번쯤 바삐 사는 일상의 굴레에서 이런 "내려놓음"의 삶의 미학이 그리워진다.
오동잎 떨어져 내려오는 소리조차 차마 조용한 이 깊어가는 가을밤에....

열매가 많은 모감주 나무와 상자처럼 쌓여 있는 모감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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