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와 악양 최참판
2017년 4월 23일
한국에 온지 이틀째. 시차적응도 제대로 안 된데다 어머니가 잠들어 계신 고향산천을 밟는다는 설레임에 새벽잠을 설쳤다. 부산 누나집을 나온 차가 남해고속도로 톨게이트로 진입하자 새벽을 덮고 있던 봄안개가 하나둘 겉치기 시작한다. 이정표가 한글로 적혀 있으니 신기하고, 익숙한 지명들이 하나 둘 스쳐지나갈 때마다 머릿속에 담겨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소환되며 가슴이 뛴다. 고향은 그래서 좋은 것인가?
악양면 평사리에 도착했다. 바로 박경리 선생의 대작 "토지"의 배경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내 태어난 곳에서 반나절 걸쳐 높고 낮은 재를 두번 넘으면 이곳에 닿는다. 2005년 여름, 한국에 왔을 때 이곳을 찾은 후 이번이 12년만의 두번째 방문이다. 아무런 연고도 친척도 없는 평사리를 일정을 쪼개 꼭 둘러보고 싶었던 이유는 내 마음 속의 담아둔 두 여인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평생을 글 쓰는 문인으로 살다 2008년에 세상을 떠난 박경리 선생. 그녀를 기리기 위해 작년에 건립된 '박경리 문학관'을 둘러보는 것이 그 첫번째 이유다. 그리고, 12년 전 최참판댁의 사랑채에서 어머니와 내가 마주 앉아 평사리 들녘에서 불어오는 넉넉한 들바람이 맞으며 고향 마을의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던 그 아련히 빛바랜 기억. 그 기억의 편린들을 퍼즐처럼 모아 하나의 추억으로 맞춰보고 싶었던 것이 둘째 이유였다.
당시 세월을 힘겹게 늙어오신 어머니만큼이나 속절없이 변해만 가는 고향산천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노파심이 생겼었다. 하여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 지리산 주위를 돌아봤을 때 이 평사리의 최참판댁을 들렀던 낡은 옛 기억은 차가 마을 입구를 지나면서 봄단장에 분주한 나뭇잎들의 새록새록만큼 새롭게 다가온다.
굳이 이유 하나를 더 붙이자면, 경남 진주를 본거지로 하는 극단 '큰들'이 토지를 주제로 한 노천 뮤지컬이 최참판댁에서 주말마다 공연마당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한국의 마당놀이까지 즐길 수 있다는 게 나에게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였다.
완연한 봄기운을 몰고 온 섬진강가의 벚나무들은 이미 그 하얀 꽃잎을 강바람에 실어 어디엔가 날려 보낸 지 오래였다. 강변을 달리는 이 나그네의 눈에 간혹 길가 곳곳에 곱게 핀 복사꽃을 담을 수 있어 좋았다. 얇은 녹색의 감나무 꽃은 눈에 띌 듯 말 듯 피여 있었다. 고된 노동을 요하는 보리농사나 벼농사 대신에 손이 덜가고 농가 수입원이 좋은 길가 논밭에 심어진 매화나무에는 이미 봄비를 한껏 머금은 자그마한 매실들이 알알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꽃대궐의 그 끝자락에 평사리가 살포시 그 모습을 들어내고 있었다.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언덕길 양쪽에 들어선 많은 가계를 지났다. 최참판댁 입구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 굿판의 노릿꾼들이 전국에서 온 방문객을 모으기 위해 꽹과리와 장구를 치며 마당몰이를 시작했다.
20여 분간 조연들의 익살스러운 바람몰이 굿판이 끝나자, 객을 뒷줄로 세워 본격적으로 한판 놀아보겠노라며 최참판댁 안마당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공연 세팅이 들어선 안채에는 이내 수백 명의 관광객이 자리를 부지런히 꿰차고 있었다.
대하 소설 토지의 내용대로 최참판의 재물을 탐내던 조준구와 20년 넘게 머슴으로 살아온 길상이가 등장한다. 그리고 한복을 단아히 입은 서희가 안채에서 차례로 각본대로 관중앞에 모습을 보인다. 배경도 하동에서 만주로 다시 하동으로 옮겨가며 극의 세트와 등장인물들이 작가의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었다.
토지의 시대적 배경은 1894년 하동 악양의 평사리에 위치한 최참판 일가와 주변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진주, 만주의 용정, 서울, 동경 등등으로 이야기의 장소가 바뀌면서 39년간의 이야기를 근대 한국사의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민초들의 삶을 기술하고 있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광복절인 8월 15일에 끝이 나는데, "....해방된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로 그 대단원의 마침표를 찍고 있다. 장장 3만여 장에 이르는 원고지를 선생은 1969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1994년까지 25년에 걸쳐 집필된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대하소설이다.
흥겨진진하면서도 탄탄하게 구성된 2시간여의 무료 마당놀이가 끝나자마자 내가 발길을 옮긴 곳은 최참판댁 왼쪽에 위치한 작년에 개관된 '박경리 문학관'이었다. 기념관 안에는 원주에 사는 외동딸이 무상 대여한 생전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빛바랜 가족사진, 평소 사용하시던 펜과 일용품 그리고 원고지와 함께 25년에 걸쳐 연재된 토지 관련 책자들과 생전의 방송국에 의해 촬영된 비디오가 상영되고 있었다.
25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 소설을 쓰다 보니 소설이 연재된 곳도 유명한 문학잡지부터 여성지와 신문에 실려서 그런지 옛 시절을 구가했던 여자 탤런트의 표지모델로 한 "주부생활"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 전시품 중에 각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1979년 동아일보 등에 선생의 인터뷰가 실린 스크랩이었다.
"글 쓴다는 것은 고통과 마주 서는 일"
"作家 후회 않지만 虚無한 느낌도"
"글 쓰는 일은 뼈를 깎는 것 같은 苦役"
토지에 등장하는 이름을 가진 인물만도 600여 명이 넘는다.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다. 인물의 심리적 묘사를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내면 깊숙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엿볼 수 있다. 원고지 칸칸을 채우며 글자가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문체를 이룬다. 표현력 역시 문학적 기교를 넘어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면서 우리 민족의 격동기인 식민지, 독립운동, 동학운동등 역사적 사건들을 면면히 사마천의 역사서처럼 잔잔히 기술하고 있다.
사실, 선생은 토지를 집필하기 전에 이곳 평사리에 와본 적도 없었고, 집필 후 30년이 지난 후에야 이곳을 들렀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서 외할머니가 살던 거제도에 역병(콜레라)이 돌아 황금빛 들판에 읶어가는 벼를 거둬들일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배경을 마음에 담아 소설의 배경이 될 곳을 찾던 중에 지도에서 이곳 평사리를 발견했다고 한다.
결국 선생이 택한 이곳은 첫째로 지리산을 뒷배경으로 넓은 평야에 섬진강이 앞에 흐르며, 둘째로 민족의 역사적 상처가 지리산과 섬진강에 있으며, 그리고 셋째로는 통영의 경상도 방언이 고스란히 살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선생의 대작 토지가 불어를 비롯해 몇 개 국어로 번역되어 판매되고, 국민작가로 추앙을 받으며, 토지를 줄거리로 한 TV 드리마만 3번 방영되었고, 각종 영화와 연극에도 수없이 상영되는 등 가히 이 소설은 한국 현대문학의 백미라 부르기에 글을 쓰는 작가들도 주저치 않는다.
그러기에, 2008년에 돌아가신 후에도 고향 경남 통영과 노년의 20여 년을 지낸 강원도 원주, 그리고 토지의 무대인 이곳의 최참판댁의 이렇게 전국에 세 군데나 문학관이 들어서 있으니 얼핏 선생의 삶의 발자취를 모르는 사람들은 평생을 행복하게 멋있게 살다가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보다 굴곡 많은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선생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버리고 젊은 여자와 재혼하는 가운데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온 홀어머니와 사춘기를 보냈고, 어렵사리 진주여고를 졸업하자마자 1946년에 결혼 후 남편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동난 중에 형무소에서 목숨을 잃고, 곧이어 어린 금쪽같은 아들마저 잃어버렸다.
그 후에 토지 집필 초반에 유방암으로 가슴의 반을 도려내면서도 붕대를 감으면서도 집필을 했다. 외동딸의 남편 김지하 시인이 유신 반체제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까지 받고 징역살이를 하자 딸과 함께 어린 두 손자를 돌보며 옥살이 뒷바라지를 하는 등, 평범한 여자로서의 일생을 보내지 못했다.
선생의 이런 아픈 가족사가 있었기에 "삶이 평탄했다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는지 모른다. 인기의 절정을 구가하던 때에도 어느 단체나 돈이 되는 유혹을 뿌리치고 서울에서 원주로 거처를 옮겨가며 오로지 작품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스스로 외로운 길을 뚜벅뚜벅 걸어왔기에 선생의 삶의 고뇌와 처절한 아픔이 토지에 고스란히 녹아내려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선생은 생전에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고 생명을 키워내는 소리 3가지를 말한 적이 있다. 첫째가 마른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요, 두 번째가 아기가 엄마 젖 삼키는 소리며, 세 번째가 소여물 씹는 소리라 했다. 그리고 한 TV 인터뷰에서 "새들이 노래하고 나비가 춤을 춘다는 것은 사람의 관점이고 새는 짝을 찾기 위한 노력이고, 나비가 날개를 흔드는 것은 노동하는 것이다" 라며 인간 위주의 관념으로부터 탈피를 주문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2001년 최참판댁을 복원해 놓고 토지문학제라는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허리를 다쳐 운신이 불편한 몸으로 외동딸의 부축을 받고 하동 섬진강 강변길을 따라 30년이 지난 뒤에 처음으로 이 평사리 작품의 현장을 둘러보고 나서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댁 때문에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은 아닌지, 먹고살 만한 도시 인간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이처럼 선생의 생명에 대한 소중함, 자연에 대한 경외함을 평소에 얼마나 각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스스로 폐암 항암제의 투입을 거절하며 사람의 생명을 약으로 저울질하면서까지 살기는 싫다고 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니 참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하니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며 생과 사를 구별하지 않고 이 세상을 떠남에 초연함을 잃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은 세계를 준다 하여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라 말한 것처럼 이제 그 그리운 아들이 기다리는 세상으로의 여행을 스스로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 시간 정도의 문학관 산책을 마치고 다시 관객들이 다 빠져나간 최참판댁 사랑채로 발길을 돌렸다. 대청마루에 허리를 걸터앉고 낮은 기와 담장 너머 보이는 평사리 평원에는 만물들이 봄기운을 먹고 파릇파릇 자라고 있었다.
평사리 넓은 들녘의 서쪽으로는 철쭉으로 유명한 형제봉이 있고, 반대편 동쪽으로 구제봉이 솟아 있는데 그 봉우리만 넘으면 내 고향 적량마을이 나온다. 산세가 높은 탓에 길을 트지 않아 평사리로 오려면 차로는 하동읍으로 나와 섬진강을 따라 다시 들어가야 한다. 걸어서 오르면 재를 두 번이나 넘어야 하고 하루 반나절 이상은 족히 걸리는 거리이다.
잠시 고즈넉한 봄날의 오후에 살포시 따가운 햇살을 피해 눈을 지그시 감는다. 12년 전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우리 어머니도 박경리 선생과 연배가 비슷한 1928년생이시고, 둘 다 젊어서 남편을 잃어 과부가 되셨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으니 6-7살쯤 되었을 요즘 같은 봄날이었다.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고 없는 사이에 이웃집 마당에 곱게 핀 백일홍을 훔쳐와 우리 집 토담 아래의 감나무 밑에다 심어뒀다. 그런데, 내가 도둑질한 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 저녁에 어머니는 나를 굶기고 대나무 가지로 만든 매로 실컷 맞고 잠이 들어 버렸다. 새벽녘에 소변이 마려워 일어나려는데 어머니의 거친 손으로 내 장딴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던 기억은 내가 어머니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강인한 촉감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러고 보니, 토지의 내용에 이런 글이 있다.
"........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단장한 청상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
가을의 대지에는 열매를 맺어놓고 쓰러진 잔해가 굴러있다. 여기저기 얼마든지 굴러있다. "
선생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마음속의 고뇌와 번뇌를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글로 옮김으로써 힘든 세월을 이겨왔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탓에 글쓰기도 못하고 그저 당시의 많은 우리의 어머니처럼 가슴으로 앓기만 하면서 농사일로 이웃 동래 아낙네들과 구두로서 당신의 삶을 이겨왔고, 자라나는 자식을 바라보면서 삶의 아픔을 이겨왔는지 모른다.
시차 적응에 힘들었고 모처럼 운전하는 한국에서의 익숙지 않은 도로 운전으로 고단한 하루였다. 그러나 마음속의 두 여인을 이렇게 만나고 나니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한 유명한 여인은 글로서 우리에게 삶의 고귀함을 남겼다. 한 평범한 여인은 평소의 언행으로서 나에게 아름다운 어머니로 남았다.
슬슬 이제 저물어가는 해가 평사리 뒤편으로 넘어가려고 하고 또 이렇게 고향에서의 하루가 저물어 가려고 하고 있다. 다시 최참판댁을 빠져나와 차를 몰고 섬진강가를 따라 화개장터로 향했다. 그곳에서 12년 전에 어머니와 나눠 먹었던 녹차 엿과 호박엿이 허기진 나의 속을 채워 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고향의 그 넉넉함이 이내 집 떠나 정든 내 고향 찾은 이 추억에 굶주린 나그네의 아련한 기억을 잔잔히 하지만 차곡차곡 채워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