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화엄사의 홍매화
2017년 4월 23일
화계장터를 나와 자동차로 초행길인 섬진강변을 따라 구례 화엄사로 향했다. 지리산 안에 크고 작은 암자와 절이 수십여 개 있다고 들었다. 이 절을 찾아가는 이유는 오직 하나. 바로 자태나 색에서 한국 최고의 매화로 칭하는 화엄사 홍매화 나무를 보기 위해서다. 19번 국도를 따라 30분쯤 달려 지리산 3대 사찰(쌍계사, 화엄사, 천은사) 중에 제일 크다는 이 고찰의 입구 매표소에 도착하니 거의 오후 5시쯤 되었다.
절은 신령한 부처님을 모신 곳이라 속세의 범인들이 불상이 있는 대웅전까지 들어가려면 3개의 산문(山門)을 통과해야 한다고 한다. 먼저 한쪽에 기둥 하나로만 세워져 산과 절의 이름이 새겨진 일주문(一柱門)을 지나 세속의 마음을 깨끗이 한다. 그리고 부처와 스님들을 수호한다는 천왕문(天王門)을 거친다. 마지막으로 번뇌와 해탈은 둘이 아니라는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매표 안내소 바로 앞에 큰 현판으로 '지리산대화엄사'라고 적혀 있고, 양쪽에 큰 기둥이 세워진 이 웅장한 일주문이 늦게 산사를 찾아온 이 나그네에게 인사라도 하듯 내려보고 있다.
이 고찰은 원래 1500여 년 전 백제 때 인도에서 온 승려에 의해 창건되었다. 다른 큰 사철처럼 임진왜란 당시 이곳의 승병들이 왜적과 싸운 데에 앙갚음으로 왜장 카토 기요마사(加藤 淸正)에 의해 전소되었으나, 인조 1630년에 다시 새로 지었다 한다.
차를 주차장에 얼른 세우고 노고단 쪽에서 내려오는 개울물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불이문에 해당하는 작은 문을 들어서니 '智異山華嚴寺'란 인조의 숙부 의창군이 적었다는 친필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조에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하는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구례 고을의 향리들이 절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려고 해도 왕실의 친필이 걸려 있으면 이를 금했다고 하니, 이 화엄사의 위엄을 가늠하고도 남는다.
동백나무가 아름드리 잘 심겨진 대웅전을 향해 올라가는 회색 언덕과 넉넉히 넓은 불당 앞마당에는 불자들의 염원을 담은 형형색색의 고운 연등이 산들바람을 맞이한다. 고즈넉한 산사의 맑은 봄 하늘 아래에서 이 낯선 손님에게 손짓하듯 하늘거리고 있다. 부처님 오신 날을 1주일 정도 남겨 놓아 관광객이 많을 거라 생각해 일부러 늦은 시간에 찾아오기는 했다. 그런데 주말인데도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어 절간 처마에 매달려 있는 풍경소리만 적막을 뚫고 간간히 섬진강 물결처럼 퍼져 온다.
어떻게 연등을 신청해서 언제부터 달며, 초파일이 끝난 후에 이 많은 등을 어떻게 처분하는지 불교신자가 아닌 나로서는 알 수는 없다. 연등 하나하나에 각자의 사연이 담긴 인생을 매달아 두고 있다. 속세의 소원을 빌며 스스로 마음의 위안을 삼는 것은 구도자(求道者)로서의 내적 수양을 운운하기 이전에 절대자를 의지하는 마음이 없이는 안 되는 일이다.
스마트폰에 찍어 둔 화엄사 경내 약도를 따라 그 홍매화 나무가 있다는 곳을 향했다. 대웅전의 왼쪽에 위치한 나무를 향해 돌계단을 한 걸음씩 가파르게 올랐다. 이윽고 돌단 위에 놓인 2층 크기의 홍매화 그 수려한 자태가 새색시의 속살 보여주듯 조금씩 눈에 들어와 안긴다.
한국에 오기 전에 유튜브에서 지난 3월 말에 만개한 이 선분홍의 홍매화 영상이 다행히 올라와 봤다. 초봄의 찬 공기를 뚫고 화사히 피었을 그 다섯 꽃잎은 이미 다 떨어져 없다. 파릇한 나뭇잎만 갈아입고서 마치 "한물간 나를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보라"는 듯 요염히 서서 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우리나라 사찰에 있는 3대 고매(古梅)로 전남 순천에 선암사의 홍매(紅梅), 금둔사의 청매(靑梅), 그리고 이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라 한다. 엄밀히 이 매화나무도 분홍 꽃을 피운다. 하지만, 그 색이 너무 진붉고 고와 차라리 검게 보여서 우리나라 유일의 '흑매화'라 부른다고 한다. 꽃이 만개했을 때 왔더라면 시각적 도취는 물론이거니와 매향(梅香)에 한껏 들이키면서 볼 수 있어 그 감흥이 남달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 폰을 꺼내 여러 각도로 찰나의 순간을 담아내듯 사진을 찍어댄다. 문득, 이 홍매화 뒤편에 휘어져 있는 나무 기둥 하나가 앵글에 잡혀 깜짝 놀라 손을 내려놓고 말았다. 휘어진 나무 기둥으로 다가가 그 모습을 담아 보았다. 이 건물은 무엇이며 또 얼마나 처마가 무거웠길래 이렇게 휘어졌을까?
건물 정면으로 걸어가니 깨달음이 황제와 같다고 하여 각황전(覺皇殿)이라 불리는 현판이 힘겨운 세월을 이기며 걸려있다. 국보 제 67호로까지 지정된 조선 숙종 때 세워진 2층 목조 건물로 이 휘어진 기둥은 오른쪽 뒤의 처마를 받쳐주는 4개의 기둥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이 매화나무는 당시 각황전의 건축을 기념하여 심겨졌다 전해지니 공교롭게도 휜 기둥과 이 홍매화는 서로 다가갈 수 없는 겨우 10여 미터의 거리를 같이 긴 세월을 유지한 채 함께 늙어온 셈이다.
그 400여년의 세월을 두고 이 두 나무는 너무나도 다른 운명의 길을 걸어왔다. 기념수로 심은 이 홍매화 나무는 가지가 더욱 무성히 자라 매년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 기둥은 곧고 튼튼히 자란 탓에 사찰 건축을 위한 목재로 베임을 받았다. 처마끝으로 내려온 엄청난 무게를 힘겹게 지고서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가며 휘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한 달 전 영상을 다시 보니 그 휜 기둥이 멀리서나마 비쳐졌으나, 홍매화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까지 빼앗겨 알아보지도 못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영상으로 자세히 봐도 사진을 찍으러 온 전문 작가들도 이 홍매화를 중심으로 산사의 고풍스러운 앵글에 담으려 했지, 긴 세월을 힘겹게 이겨온 이 휜 기둥은 어느 누구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문득,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너무 화려한 것만을 쫓다가 볼품 없어 보이는 것, 하지만 정작 소중한 것들에는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세상의 칭찬과 명예만 찾다 보니 이 사찰 구석진 곳에서 수백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이겨온 이 기둥처럼 스스로를 희생해 온 것들에 대해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으로 인적 없이 서있는 기둥을 카메라에 담아 둔다. 그리고 단으로 올라가 손으로 기둥을 어루만지며 긴 세월 참 수고하셨노라는 말을 전한다.
다시 발길을 돌려 구층암로 향했다. 회색 승복을 정갈히 차려 입고 지나가는 스님에게 몇 분의 스님이 화엄사에 기거하시냐고 물으니, 보통은 상주인원이 100여 명이라고 한다. 늦봄과 늦가을에 시작되는 하안거(夏安居)나 동안거(冬安居) 때는 더 많은 스님들이 선방에 기거하면서 3개월 동안 외부와 출입을 끊고 참선 수행에만 몰두한다고 귀뜀해 준다.
절대자인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와는 달리, 내가 아는 불교는 삶 그 자체가 고(苦)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상하다. 따라서 소유에 집착해서는 안되며 현실 세계에서 자기 수행을 통한 해탈로 열반의 극락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2500년 전에 히말라야를 넘어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 등을 거치면서 나라별로 섬기는 풍습은 다를지라도 긴 세월 동안 올곧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실로 인간의 믿음은 대를 이어서도 대단하다.
고대 비단길 이전에 생겼다는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과의 맞교환을 위해 사용되었다던 티베트 고원을 가로지르는 차마고도(茶馬古道)를 소개한 다큐멘터리가 떠올려진다. 그 길은 중국 쓰촨성에서 티베트 불교의 성지인 라싸까지 약 2100 km에 이른다. 지구상 최고의 고행길을 세 번 걷고 한번 절하는 삼보일배(三步一拜)로 해발 4천 미터의 고원의 얼음길과 자갈길도 마다치 않는다. 이렇게 7개월여간의 긴 고행길을 오히려 생의 축복으로 생각하는 티베트 불자들이 있기에 속세의 수많은 불자들이 자신 대신에 고행을 행하는 그들을 통해 대리 위안을 받으며 불제자로 사는 것일까?
불제자에 관한 일화들이 이 사찰을 거니는 내내 긴 다큐처럼 떠오른다. 일본의 어느 절에 아름다운 비구니 스님이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미모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한다. 하지만 그 비구니는 고통스러워한 나머지,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칼로 난도질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꽃과 글을 좋아하던 법정 스님도 자신의 생전 발간한 베스트셀러 책들을 절판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갈 정도로 나 같은 범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불제자로서의 자기 절제의 본을 보여준 이 시대의 큰스님이었다.
이뿐이랴? 중도 뇌성마비를 앓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어린 소녀의 실화는 가슴 아린 감동으로 다가온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힘든 세상을 하직할 각오로 3천 배를 해야 세상 사람을 만나줬던 해인사의 성철 큰스님. 그 노승을 7살 소녀가 만나 스님의 권고로 하루 천배의 절을 시작한 후, 뒤틀린 몸이 정상으로 교정되었다 한다. 기억력과 이해력도 기적같이 되살아나 결국에는 홍익대 미술대학원 석사과정까지 합격한 한경혜 화가가 있다.
이제 슬슬 중년의 나이로 접어드는 그녀. 스님의 권면을 받은 지 36년이 지난 지금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머리, 양손과 양 무릎 이렇게 몸의 다섯 곳을 모두 땅에 붙여서 자신을 최대한 낮춰서 부처에게 절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를 한다고 들었다. 그 기도의 간절함이 천당에 닿았는지 대한민국 미술 대전에서 두 번의 특선과 6번의 입선이란 입지전적인 성과를 일궈냈다고 한다.
이처럼 나라와 시대는 달라도 아직도 많은 구도자(求道者)들은 끊임없이 자기가 타고난 운명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스스로의 주어진 운명을 숙명으로 느끼지 않고 끊임없이 엄하게 자신에게 채찍을 가한다. 삶이 유한함에도 그 유한함 속에 진귀한 순간과 만나는 인간 면상을 귀히 여긴다. 발부리에 걸린 돌멩이 하나에도 인연을 생각한다. 스처가는 사람들이 툭 던지는 독기어린 말투에서도 깨달음을 찾는다. 속으로 세상의 빈정을 삼키며 영산인 지리산을 안은 이 고찰의 넉넉함처럼 그런 마음을 품어야 구도자의 뒤꽁무니라도 따라갈 수 있는 것일까?
구층암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슬슬 허기를 느낀다. 아래 현대식 건물 밖으로 몇 안 남은 관광객들이 식기를 들고 가서 설거지하는 것을 보고서야 나도 발길이 바빠졌다. 행여 하루를 정리하고 문을 닫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다행히도 절간 산채 비빔밥 재료가 남아 혼밥을 맛나게 먹었다. 식기를 씻어두고 산문을 나서려는데 사찰 내의 매점에서 지리산 고로쇠 수액을 팔고 있길래 한 병을 사서 절을 빠져나왔다.
차 안에 내비게이션으로 뉴욕에서 재즈 드럼을 공부하다 헤어진 후 13여 년간 만나지 못한 지인을 만나야 한다. 그가 있는 경남 함양의 다락논으로 유명한 마천면까지 갈려면 족히 밤 9시는 넘어야 할 것 같다. 사전에 연락을 취한 후 차는 다시 화엄사 계곡을 나와 다시 지리산 내륙으로 들어간다. 몇 구비의 가파른 고개를 넘어 달궁계곡과 뱀사골을 지나야 하는 40여 킬로의 밤길이지만 마음은 급하지 않다.
어둠에 덮이기 시작한 화엄사를 뒤로 하면서 이 고운 매화꽃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른 초봄에 피는 노란 산수유로 유명하다는 북서쪽 산자락에 위치한 구례 산수유 마을을 언제 한 번 찾아올지!! 광양 다압의 매화축제도 쌍계사 10리의 벚꽃도 내 생에 볼 날이 그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다.
한국의 큰 스님들은 불교도에게 주문했던 것처럼 세상의 욕망을 채우는 삶을 살지 말기를 주문한다. 대신, 자신의 인생에 의미를 채우기 위해 바삐 살다 보면 이 산사의 매화와 마주할 시간은 더 짧아질 것은 틀림없다.
천오백 년을 자랑하는 이 고찰(古刹)의 찰이 '찰나(刹那)'과 같은 한자를 쓰고 있다. 한자 사전에 찾으면 75분의 1초에 해당한다고 하다. 인간사 내 마음먹기 따라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일 수도 있는데 돌이켜 그 휜 나무 기둥처럼 인내하고 비바람 맞아가며 살다 보면 그 날은 언젠가는 오리라...
불현듯 반나절도 채 되지 않은 산사(山寺)의 방문이었다. 낮은 언덕에 봄빛을 한껏 받으며 핀 연분홍의 진달래며, 담벼락에 정갈히 산사의 뜰을 채우고 있던 노송나무와 백동백을 볼 수 있는 눈호강을 했다. 내가 구도자가 머무는 고찰이 아니라 꽃대궐을 다녀온 듯한 무아지경의 황홀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고향 찾은 나그네의 발길보다 빨리 고향의 봄밤은 이렇게 깊어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