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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ric Apr 25. 2018

딸이 남긴 그 한마디

11월 30일 밤에 생긴 일..

오늘 아침 회의 준비하느라 밤 11시까지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집에 자정 넘어 들어와서도 마음이 안 놓여 컴퓨터로 2시까지 일하고 잠든 바람에 몸이 무척 피곤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에게 옮긴 못된 감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을 뜨니 목구멍을 바늘로 찌르 듯 따가워 침조차 못 삼켰다.  

머리가 아프고 온 몸이 무거웠지만 안 아픈 척하고 회의를 마치고 점심도 그르고 일상 업무를 보다가 오후 3시쯤 퇴근할려니 문득 까마득히 잊고 있던 일이 있었다. 11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달력상으로 가을이 끝나는 날이기도 하지만, 장애인 아들을 매주 토요일마다 돌봐 주는 단체를 돕기 위해 회사에 기부 신청을 해야 하는 마감날이 바로 오늘까지이기 때문이다.

회사 직원이 비영리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근무 시간외에 하면 1시간에 100불, 50시간까지 쳐주니 5천 불까지 그 단체가 받게 해 줄 수 있어 감사하지만, 아들이 단체에서 해 주는 내역을 세세히 적어 정해진 양식을 적어야 하니 오늘처럼 몸이 안 좋은 날에 지난 일 년을 기억하면서 적는 것도 고역일 수 있다. 하지만, 더 힘든 것은 5살이나 10살이나 14살이 된 지금도 아들의 말과 행동에는 차도가 없으니, 발달장애를 둔 부모로서는 아들의 앞으로의 10년, 20년, 그리고 그 후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낯선 남녀 화장실을 갈 때는 남녀의 그림이 문에 붙여진 곳은 알아서 남자 화장실을 찾아갈 수 있다. 하지만, 글로만 적어 놓은 곳은 헷갈려 실수로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버리면 딸이나 집사람이 없어 내가 들어갈 수도 없으니 난감할 때가 많다. 남이 마시고 있는 커피를 낚아채 꿀꺽꿀꺽 마시거나, 먼지가 쌓인 쇼윈도 틈을 손가락으로 신나게 훑고 지나가면 식구들은 질색을 했다.

이런 물불을 못 가리는 아들이 성인이 되어서 나이가 들 때면 자연의 섭리상 우리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니 천덕꾸러기 아들을 돌봐 줄 가족의 수가 딸만 남게 되니 언젠가는 결국 1/3으로 줄어든다. 외사촌들이 주위에 있다고는 하나, 여기의 이기적인 생활에 길들여진 그들까지 아들 예준이를 돌봐줄 거라고 생각지 않기에 기부금 신청을 위해 기재하는 시간이 올해는 유달리 마음이 무거웠다. 

이래저래 심신이 피곤한 오늘이기에 오후 4시쯤 회사를 나와 집에 도착하니 운전석에 나도 모르게 시동을 켠 채로 10여분 잠들다 깼다. 곤한 몸을 이끌고 집안에 들어가 샤워도 못하고 손만 대충 씻고 가족들에게 먼저 잔다고 인사하고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고 한참을 자다 화장실 갈려고 일어나 보니 벌써 자정이 지났고, 목이 말라 방 밖을 나오니, 딸 방에 불이 아직도 켜져 있다. 

"아니, 이 녀석이 이 시간까지...."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딸이 이번 주 일요일 맨해튼에서 쳐야 하는 중국어 시험(HSK) 공부를 하느라 머리를 책 아래에 파묻고 있다. 내년 대학입시에 그 성적을 증빙자료로 첨부하면 입학사정에 유리하다는 말을 듣고 자원해 치는 시험이기는 하나 며칠 남지 않은 시험을 앞두고 본인도 마음이 급한 모양이다.

"아니, 아빠가 일찍 자라고 했잖아! 공부도 좋지만 건강도 생각해야지.."
그러자, 딸이 하는 말, "아빠, 예준이가 있잖아............." 
말꼬리를 흐리며 내뱉는 이 몇 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순간 자다 일어나 멍한 내 머릿속이 하얗게 바꿔지는 느낌이 들면서 뭔가 코 끝이 찡해온다.

처자식 먹여 살린다고 늘 나만 고생하고 나만 혼자 마음앓이하는 줄만 알았는데, 오래간만에 딸이 생각 없이 내색을 하는 바람에 딸도 역시 어린 마음에 힘들어하고 있고, 자기 동생의 장래를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는 본인이 책임져야 할 시간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이렇게 부모 몰래 준비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그런 남동생을 자신에게 속절없이 안겨준 부모가 원망스럽고 짜증 났을 테고, 동생의 이상한 행동을 동래 아이들이 불편한 시선으로 보거나 놀리면 딸도 핏줄이라 속상해했다. 그래서,  친구가 한 명도 없는 동생에게 누나 노릇도 모자라 친구 노릇까지 해 주는 딸이 고마우면서도, 우리가 힘들 때마다 딸보고 이해만 해 달라고 주문만 했던 게 오히려 어린 가슴에 바늘 찌르듯 아파왔을지 모르겠다. 

이제 몸이 아파 푹 자야 하는데 이불을 뒤집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누가 없고 가도 모를 정도로 천지 모르고 잠자는 아들 때문에 잠이 안 오고,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잠을 설치는 딸만 두고 애비인 내가 잠을 또 청하는 것도 미안하다. 몸 아픈 건 잠시고 내 혼자 아파하면 그만이지만, 마음까지 아려오는 건 쉽게 참을 수가 없다. 이래저래 잠 못 드는 올해 마지막 가을밤은 내 속내도 모르고 매몰차게 소리 없이 흘러만 가고 있다. 

조용히 그러나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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