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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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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차연 Mar 29. 2017

4. 제주 여름


7,5, 제주 이사 9일 차

남은 자잘한 집수리가 끝나갈 때쯤 서울에서 친구들이 집 외벽 페인트칠을 해주러 내려왔다.

며칠간의 노동으로 잔뜩 예민해져 있었는데 친구들 얼굴을 보니 마냥 좋았다.

서울에서 공수해온 향초, 그릇, 커피 원두, 모기장 등을 풀어놓고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해풍 때문에 빈 곳 없이 갈라진 집의 외벽을 긁어내고 페인트를 단단하게 붙잡아 줄 바인더를 바른 후 만만한 흰색 페인트를 발라줬다. 그렇게 하루를 말리고 바닷가 식당에서 다 같이 밀면을 사 먹고 다음 날 일찍 한 번 더 페인트를 발라주니 외관이 몰라보게 말끔해졌다.

밝아진 집의 외벽만큼 찌푸렸던 며칠이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며칠 간 일꾼을 자처한 친구들 덕분에 환기되었다.


7.7

아침에 커피를 마시려고 전기 포트를 들었더니 주전자에 달팽이 한 마리가 붙어있었다.


7,8

내일부터 늦은 장마가 시작된다.

비 오는 제주에서는 뭘 하면 좋을까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그냥 집에서 그림 그리고 책이나 읽을 생각이다.

이사를 하고서 집을 수리하고 필요한 것들을 챙기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나는 그 시간들을 지나고 나니 맥이 탁 풀렸더랬다.   

아직은 차곡차곡 정리된 내 방이 낯설어서 잔뜩 흐린 하늘을 보며 거실에서 서성인다.






7,9

종일 날이 흐리다. 비가 올락 말락 변덕을 부린다.

이제야 본격적인 '제주 생활'이다.

들뜬 낯섦이 여행에 온 듯 하루의 흐름이 어색하다.

마당으로 고즈넉이 찾아드는 저녁, 괜스레 쓸쓸함과 호젓함으로 소설책을 손에 끼고 이방 저 방을 오간다.

그림을 그릴까 싶어 내 방에 앉았지만 공연히 시간만 흘려보낸다.

여기 와서는 하루가 짧게 느껴진다.  

막연했던 '시골에서의 일 년'이 이제 시작이다. 주변에서 부럽다는 말을 듣고 으쓱한 마음이 일기도 하지만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만들고 싶을 뿐 확인받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에 대한 물리적인 거리감 자체가 아니었을까.

나 자신으로 있을 곳.



점심에는 즐겨 먹던 평양냉면을 대신할 산방식당의 밀면을 먹고 돌아와 방 안에 앉았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이다.


7,12

비 오는 제주에선 뭘 하고 지낼까 했는데, 뜬눈으로 하우스 오브 카드를 시즌 2까지 다 봤다.


7,13

태풍으로 주말 내내 집에서 보내고 이제야 금능의 카페에 걸어 나왔다.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침하게 더운 날씨다.

일 년 전 여행으로 왔던 금능과 지금의 금능은 다른 곳처럼 느껴진다. 금능 해수욕장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잤는데 자리가 설어 파도 소리를 들으며 헛잠을 자다 새벽에 일어나 혼자 산책을 하면서 하늘과 바다 빛깔이 참 예쁜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금능이 옆 동네라 자주 오게 되는데 아침뿐 아니라 온종일 빛깔을 달리하는 바다는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맑은 바닷물은 하얀 모래사장이 하늘색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인다. 앞바다에는 비양도가 떠 있고, 그림 같은 종려나무가 무성한 곳이다.  

더위를 피해 바다가 보이지 않는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아쉬워하자니 창 밖으로 저 멀리 구름에 쌓인 한라산이 보였다.


7.31

아침에 저절로 이빨 조각이 깨져서 어금니에 구멍이 뽕 생겼다. 하루 종일 혓바닥으로 구멍을 더듬는데 점점 커지는 느낌으로 조만간 이빨에 동굴이 생길 것만 같다.  

요즘은 바다 수영에 빠져 지낸다. 물안경을 끼고 가만 바닷물 속을 내려다보면  빛을 따라 일렁일렁 모래가 춤을 춘다. 물살에 몸이 둥글둥글 돈 건 지 현기증이 인다. 편안하면서 두렵고 부드러우면서 서글프다.  


며칠 전에는 네이버 지도로 근방에 뭐가 있나 찾아보다 얼마 후에 문을 닫는 주류 공장에 찾아가 라벨이 붙지 않은 술을 잔뜩 사 왔다. 뒤죽박죽 섞어 온 탓인지 귤 와인인 줄 알고 따면 복분자주다. 따는 것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서 제비뽑기 하듯 마시고 있다.

시금털털한 맛의 복분자주를 뽑은 오늘은 블루문이 떴다. 머리 위로 크고 둥근달이 쨍하다.



8,4

오늘의 기온 31도.

사탕이 유리 조각처럼 조각조각 깨져 반짝이며 입안을 굴러다니다 이내 녹아 없어진다.

이 더위에 나도 몸이 끈적끈적 녹아 없어질까  

몸이 차서 여름에도 온수에 반신욕을 하던 내가 찬물로 샤워를 한다. 오소소 살이 일어나고 나도 모르게 으하- 소리를 내지르지만, 찬물 샤워만큼 빠르게 더위를 물리치는 게 없는 걸 이제야 알았다.

낮에 바닷가에서 수영하고 집에 돌아와 찬물 샤워를 하고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어느덧 저녁이다.

이렇게 지내도 되나 싶게 한가하고 느슨하다.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카레를 만들었다. 오전이 조금 덜 더울 것 같아서 부지런을 떨었는데 주방 창 쪽으로 아침 해가 떠서 결국 챙넓은 야외용 모자를 쓰고 실눈을 뜨며 카레를 만들었다. 내 카레는 오래 뭉근하게 끓여야 맛이 좋아서 땀을 뻘뻘 흘려 완성하고 다시 침실에 들어가 세 시간을 잤다.

더위와 싸워가며 만든 카레는 결국 점심밥이 됐지만,

음, 역시 맛있다.




8,5

내가 생각하는 여름철 최고의 호사는 시원한 방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마시는 거지만 얼음 굴러가는 소리가 듣고 싶어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달그락달그락 얼음 알을 굴리며 더위가 언제쯤에나 가시려나 가늠해본다.


8,8

한림항 축제를 구경하러 갔다.

말도 안 되게 더우니까 구경하는 사람보다 지친 기색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시장에 앉아 순댓국을 먹고 나니 밥이 아니라 더위를 한 그릇 먹고 온 것 같다.


 8, 15

바람 한 점 안부는 저녁,

소곤소곤한 밤들.

낮 동안 데워진 공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남편은 리코더같이 생긴 인디안플룻을 사 와서는 생각날 때마다 불고 있다.

낯선 가느다란 소리에 방 안의 공기가 흔들린다.   




8,20

여름이 매일매일 지나간다.

정점을 지나 밤이 되면 공기가 차다.

아직 실컷 바다 수영을 못했는데 아쉽기만 하다. 물속에 있으면 느긋해져 버려서 조심성이 많은 남편은 자꾸만 나한테 화를 낸다. 나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래도 조심하는데 곁에서 보면 터무니없어 보이는 모양이다. 엊그제도 그런 일로 바다에 들어갔다가 서로 토라져서 10분 만에 나와버렸다.

바다 수영은 여기 와서 생전 처음이다. 처음엔 소금기 때문에 피부가 아려오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태양 빛에 숨을 곳 없는 바다에 서서 어쩔 줄을 모르겠더니, 이제는 출렁거리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누워서 하늘을 보는 게, 몸을 둥둥 띄우고 물속을 보면서 내가 물고기라고 상상하는 게, 여울지는 빛줄기를 쓰다듬는 게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진다.

언제나 바다를 볼 수 있고 헤엄칠 수 있는 게 꿈 만같고 그것 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족된다.




8,27

주말 사이에 옥수동 지인들이 놀러 왔다 돌아갔다.

흥성거림이 사라지고 갑자기 집이 고요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엄마도 서울에 간 참이고, 남편은 일하느라 바빠서 나는 이상한 기분 상태로 오롯이 앉아 있다.


9,12

8,9,10일에 초혜와 주영이가 왔다 가고, 10,11,12일 조림이 내외가 우리 집에서 이틀을 묵고 동쪽으로 떠났다.

사람들은 제주 어디가 좋았느냐고 물어오는데 우리는 두 달이 지나도록 한림읍을 벗어나지 않고있다. 그래서 우리가 소소하게 즐기는 것들을 소개해 줄 밖에.

한림읍의 맛집에 데려가고 목장에 별을 보러 가고, 밤에 월령을 산책하고 아침 일찍 금능에서 협재까지 모래사장을 따라 걷는다.

스노클을 하고 싶었지만 물때가 오전인데, 오전은 이제 추워서 하지 못하고 협재 해수욕장에서 대신 수영을 했다. 한산한 바다는 더 깨끗해 보인다. 주영은 수영장에서만 해보던 자유형을 연거푸 연습하고 초혜는 튜브를 타고 자기도 모르게 파도에 떠밀려 갔다. 한림 오일장을 구경하고 모닝-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월령의 숨겨진 작은 해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저녁을 먹다가 생전 처음 반딧불이를 봤다.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게 비슷하니까 내가 좋은 만큼 아이들도 좋아할 걸 알고 있다. 아이들도 바닷가에서 먹은 저녁이 가장 맛있었다고 하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는 것 같아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다음 날 아침에 엄마가 불러서 잠결에 나가보니 고운 하늘에 그믐달이 예쁘게 걸려 있었다. 바로 전날 밤에 남편에게 그믐달을 본 적 있느냐고 물어봤는데, 우연의 일치 치고는 참으로 근사하다.

아이들도 깨워서 보여줄 걸 이제 생각하니 아쉽다.

조림이 내외는 원두를 잔뜩 사 와서 쌀독이 자득 찬 양 배가 부른 심정이다. 오랜만에- 우리가 제주에 내려오자마자 첫 손님이었지만 그때는 집수리에 정신이 팔려서 잠시 얘기만 나누다 헤어졌으니까. 친구가 반가워서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그동안의 얘기들을 하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는 줄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 그 사이 또 작은 한 마리의 반딧불이 폴폴거리며 마당에 날아왔다. 놀랍기도, 귀엽기도 한데 엉뚱하게 우리 집 마당에서 날아다니는 녀석이 어서 친구들 곁으로 돌아갔으면 싶었다.


9,13

아침 일찍 동쪽으로 출발해서 조림이 내외를 만나 처음으로 스킨 스쿠버를 해봤다.

두 달이 넘게 살면서 성산일출봉까지는 처음 온다.

스노클이 재밌었으니까 스킨 스쿠버는 얼마나 재밌을까. 그동안 사람들한테 들은 얘기로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그런데 처음이라 잔뜩 긴장한 상태로 4m 남짓 내려가 질질 끌려다니는 정도인 데다 스노클을 하던 바다가 더 맑고 물고기도 많아서 사실은 좀 실망을 했다. 물속에서 자유롭게 다니고 싶었는데 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딱 붙어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나는 얌전한 학생의 자세로 멈춰 서면(의사소통이 전혀 안 되니까) 가만 기다리기만 했다.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귀가 멍 했는데 다짜고짜 손으로 하트 그리기를 시키고 사진을 찍어대서 오히려 기분만 상했다. 언제나 한 번의 체험을 위한 것은 무성의하고 무신경하다. 사람에 대한 정성이 느껴지지 않아 나는 그런 것들이 특히나 싫다.

남편과 어정쩡하게 팔로 하트를 만드는 기념사진을 받아 들고 갈치조림을 먹고, 송당리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시골 동네를 산책했다.  나는 남편에게 시간을 내서 동쪽으로 놀러 가자고 조르고 있는데 막상 관광지를 다녀오면 이제는 ‘우리 집’이라 그런지 집이 가장 편하고 월령리의 낙조가 가장 예쁜 것 같다.  


우리 집에 왔다 간 사람들이 꼭 한두 개씩 물건을 두고 간다.

썬캡, 수영복, 옷가지들- 아끼는 게 아니더라도 매일 쓰던 게 없으면 불편할 테니까 보내줘야지 싶어 연락하면 괜찮다고들 한다.

일 년간 사람들이 두고 간 물건들을 모아서 전시를 할까.




점점 못생겨지는 10월

까맣게 타고 주근깨가 콕콕 박히고 좁쌀 여드름이 얼굴 중앙에 자리 잡았다.

머리는 제주 바람에 대책이 없다.

점점 더 거울을 보지 않아서 아침에 일어나 서로의 머리를 보고 웃음이 난다.

그럴 때면 시골 산다고 우리 너무한 거 아니냐며 각성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은 우리 얼굴이 너무 좋아졌다니 도시 묵은 때를 벗겨내고 점점 시골 사람의 얼굴로 변하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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