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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차연 Mar 28. 2017

3. 월령리

이제는 많이 알려진 대로 제주에는 ‘궨당’이 존재한다. 혈족, 친족을 뜻하는 말로 섬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든 가까운 혈족 관계의 사람들끼리 먼저 도와주고 챙기는 것이 이해가 될 만하다.

"사돈에 팔촌으로 걸린 궨당"이라는 말이 있듯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친척 관계로 얽혀있어 동네 어른 모두에게 '삼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지만, 최근 부쩍 이주민이 많아지면서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 이주민들이 토착민들의 텃세에 눌려 쫓겨난 이야기나 상처받은 이야기들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우리도 제주로 내려오기 전에 제주는 텃세가 심하다는 데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종종 들었고, 동네 할머니들이 아무 떼고 불쑥불쑥 찾아오셔서 몇 시간씩 앉아 계신다는 경험도 들었으니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집을 구하기 전에 제주도 여행 겸 연세 집을 구하러 내려온 적에도 그런 낌새를 엿볼 수 있었다.

제주 이주에 성공한 지인을 만나러 지인이 사는 시골 동네에  찾아간 적이 있다. 제주에서 일 년 간 살 집을 찾는다는 얘기 끝에 우연찮게 그 동네에 아주 괜찮은 주택이 몇 달 후에 비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지금도 시골 동네의 정취가 남아있어서 관광지로 유명해진 곳인데 이게 웬 행운인가 싶어 당장에 찾아갔다.

여러 채의 집을 소유한 동네 할머니가 거주하고 계신 집의 옆 집이었는데 우리가 찾아가 관심을 보이자 대뜸 들어가서 집의 내부를 보여주신다고 하셨다. 신나서 따라는 들어갔는데 가만 보니 아침을 먹고 외출한 사람들의 흔적이 즐비한 게, 지금의 세입자가 살고 있는 곳인데 의도치 않게 허락도 없이 가택침입을 한 것이었다! 마음이 불편해서 대충 훑어만 보고 나왔지만 정리 상태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도 주인 할머니께서는 지금의 세입자가 집을 너무 지저분하게 써서 내보내야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게다가 작은 방에 할머니 댁 짐을 보관하고 있고 계속 그러겠다셨는데 우리가 본 그 방은 짐을 보관하고 있는 방이라고 하기에는 침대며 옷걸이며 화장대가 아무 떼나 들어와도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겠다 싶은 상태였다.

더 놀란 것은 어렴풋 벽 여기저기에 걸려있던 화려한 프레임의 사진 액자 속의 얼굴이 할머니의 얼굴과 비슷했던 것 같아서 설마 하며 여쭤보니 할머니 가족의 역사가 줄줄이 담긴 사진들이 맞았다!

“ 내 사진 맞아!” 하시길래, “ 저.. 그럼 저희가 이 집에 사는 동안 잠깐 떼어 놓아도 되겠죠? “ 했더니 정색을 하시며 “그러면 내가 섭섭하지. 우리 아들 대학 졸업식 사진도 있는데. “ 라시며 상상도 못 한 반응이 돌아왔다.  

나는 집에 커다란 가족사진이 걸려 있는 게 싫어서 남편이 결혼사진을 크게 한 장 뽑자는 걸 차일피일 이 년째 미루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이곳에 사는 동안 아무 때고 집을 드나드는 할머니 댁 식구들과 집주인 할머니의 시집살이가 아주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런데도 바다가 보이는 마당 있는 주택이 탐나 덜컥 계약을 했었다.

매일 할머니 댁 가족사진을 보며 살 뻔했는데 뒤늦게 동네 부동산이 심상치 않게 오르고 있는 걸 염두한 할머니 아드님이 나서서 계약이 취소된 일이 있었다.



그런 일로 시골 할머니들의 영향력이 과연 이 정도이구나 싶었고, 집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할머니들이 나에게도 닥치겠구나 실감이 났다.

여러 방도로 집을 구하던 중에 우연찮게 제주도가 고향인 지인의 도움으로 월령리의 양창옥 할머니를 소개받았다.

설레며 서울에서 달려왔지만 양할머니께서 처음 소개해 주신 농가주택의 계약도 여차 저차 한 일로 당일에 틀어져버렸다. 서울에서 안고 온 설렘이 거추장스러운 고단함으로 바뀌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우리를 양할머니께서 댁으로 불러 믹스커피를 타 주셨다. 달달한 커피를 삼키며 속을 달래는데 양할머니 댁 처마에 둥지를 튼 제비가족이 보였다. 먹이를 나르는 제비 부부와 엄지만 한 새끼들 모습이 귀여워 한참을 눈으로 쫓다 보니, 조그만 둥지에서 알콩달콩 퍽이나 행복해 보여 아쉬움은 더 커져만 갔다.

서울로 돌아와서도 틀어진 계약과는 상관없이 종종 연락을 드렸던 우리를 좋게 보셨는지 양할머니께서 두 팔 걷고 나서 주셔서 부동산에 나오지 않았던 지금의 농가주택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의 영향력은 역시 위대하다. 우리는 시골 할머니들의 영향력에 바짝 무릎 꿇을 수밖에.

아침나절에 문을 벌컥벌컥 열고 들어오신대도 적응하며 살자고 다짐했다.


이사하던 날 역시나 동네 분들이 한둘씩 무리 지어 찾아와서 우리 신상에 대해 매번 같은 얘기를 해야 했지만 그 정도쯤은 애교라고 생각했다. 건너 건너 옆집에 사신다는 아저씨께서는 남편의 직업이 방송 녹음 감독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반색을 하시며 뽕짝 노래를 녹음해 달라시길래 그러러 마 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지나 싶더니 웬일인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골목에서 동네분들을 마주치면 여전히 우리의 신상을 밝혀야 하고 이사 온 집이 어느 집인지 설명해야 했지만 불쑥불쑥 찾아오신다던가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나절 늦잠을 자고 일어나 현관을 열어보면 브로콜리며 쪽파가 수북이 쌓여 있어서 어느 분이 주고 가셨는가 궁리해야 했다.

한 번은 읍내에 가서 저녁을 먹고 해가 저물어 집에 돌아와 보니 문 앞에 까맣고 둥그런 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나는 그만 고양이인 줄 알고 깜짝 놀라면서도 소리를 삼켰는데, 가만 보니 야무지게 묶여있는 까만  비닐 봉지였다. 웬 건가 싶어 집으로 들여 봉지를 풀어보니 커다란 브로콜리가 잔뜩 들어 있었다. 마을 분이 지나던 길에 슬쩍 들리신 듯 멋쩍게 마루에 쏟고 가신 브로콜리 두 박스는 하루에 세 개씩 먹어도 줄지 않아 시어머니께 보내드리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비싸서 장바구니에 한두 개씩만 넣던 브로콜리인데다 손으로 직접 농사지은 걸 아낌없이 퍼주시니 감사한 마음이 비할 수 없이 크다.





나눠 먹는 소박한 마음이 우리를 배부르게 한다.

밥을 먹으며 마을분들을 생각하고 식탁에 앉아 가족과 이웃들의 안녕을 이야기하면서 브로콜리를 꼭꼭 씹어먹고 더 건강해질 게 틀림이 없었다.

우리가 특별히 좋은 이웃을 만난 걸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은 부당하고 힘든 부분에 대해 더 말하기 쉽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양할머니께서는 한 번도 우리 집에 오시지 않으셔서 오히려 우리가 불쑥불쑥 할머니 댁에 찾아갔다. 할머니께서 좋아하실 만한 주전부리를 들고 가면 꼭 다른 걸 우리 손에 들려주셔서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결국엔 할머니 댁 마당의 파라도 뽑아와야 한다. 조카가 사는 곳이라고 일러주신 집 밭에 양할머니께서 심으신 깻잎을 맘껏 먹으라셔서 한여름 내 실컷 잘 먹었다. 이렇듯 인심이 좋으셔서 동네 할머니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는 양할머니 댁은 언제든 문이 활짝 열려있다. 찬장에서 식당에나 있을 법한 커다란 믹스커피 박스를 보여주시며 본인이 없을 때도 아무 때나 댁에 들러 커피를 타 마시고 가라고 당부하셨다. 

양할머니 댁에서 뽑은 파를 손에 덜렁덜렁 들고 집으로 걸어오자면 건너 건너 옆집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6,30

귀여운 우리 집 주소는 한림읍 월령리 253-3 주황색 지붕 집이다.

작은 마을이라 주소가 빤하지만 '주황색 지붕 집'이라고 쓰는 게 좋아서 우편물 맨 뒤에 조그맣게 적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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