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주 생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차연 Mar 28. 2017

2. 제주에서 일 년,



서울을 떠나 제주로_

이틀 전에 미리 이삿짐을 차에 실어 탁송업체를 통해 배편으로 내려 보냈다.

구입한 지 일 년이 안된 경차로 생에 첫 차이기도 했던 ‘붕붕이’를 눈물을 머금고 처분하고 중고 5인승 스타렉스를 구입해서 테트리스 하듯 이삿짐을 조수석까지 꽉꽉 채웠다.

이사 당일, 이른 아침 우리 가족과 강아지들은 비행기로 별 탈 없이 제주도에 도착했다. 다른 것보다 열 살이 훌쩍 넘은 강아지 두 녀석이 사람 나이로는 70이 넘은 노견인 데다 케이지와 비행 모두 처음인지라 걱정이 컸다.

항공사마다 애견 동반에 관한 기준이 다르고 대부분 비행기 한 대에  최대 두 마리의 동물까지만 가능해서 조건을 잘 살펴보고 미리미리 예약해야 한다.우리가 예약한 항송사의 기내 동승 기준은 종이 케이지 포함 5kg 미만이었다. 밖에 나가면 애처로운 눈빛 레이저만 발사하고 걷지를 않는 소심한 강아지 뽀루는 아슬아슬한 5.2kg이었어서 한 달 전부터 사료의 양을 줄이고 견생 최초의 다이어트에 돌입해야했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조마조마한 우리를 뒤로 하고 어리둥절한 뽀루는 다이어트 성공으로 종이박스 포함해서 정확히 5kg이었다!

그에 반해 애초부터 화물칸을 피할 수 없는 비만 강아지 똘이는 마음의 위로라도 되라고 케이지 안에 커다란 개껌을 넣어 줬더니 정신없이 개껌과 행복한 한 때를 보냈다.


제주에는 비용을 한꺼번에 지불하고 일 년 간 집을 빌려주는 연세가 대부분이다. 일 년 간 우리가 어렵게 구한 농가주택은 작은 텃밭과 감나무가 심어진 마당과 커다란 돌창고, 남녀 화장실이 분리된 야외 화장실, 나무 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작은 방이 네 개, 물부엌과 욕실이 있는 일반적인 농가주택의 구조이다.  

아파트에 살던 우리 눈에 구조가 참 특이했고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욕심이 나는 곳이었다. 우리만이 아닌지 요즘은 주택이나 아파트보다 농가주택 구하기가 더 어렵다고들 하는데 운이 좋게도 집주인분이 제주시내에 살아서 오랜 기간 방치되어 있던 농가주택을 무료로 빌릴 수 있었다. 일절 집주인에게 집수리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고 알아서 고치고 살아야 하는 단서가 붙어있기는 했다.

집을 얻고 이사 오기 직전까지는 밭에서 야채를 키워 먹고, 강아지들이 뛰어노는 마당에서 이불을 널고, 제주 돌담으로 된 삼각형 지붕의 창고에서 페인팅을 하는 꿈같은 장면을 그리며 달뜬 마음이 하루하루 부풀어만 갔다.

시골의 오래된 농가주택은 손봐야 할 곳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는데도 마음이 동동 떠다니느라 미리 집을 고쳐놔야겠다는 현실적인 판단은 미쳐 하지 못하고 집을 구했다는 설레임과 살면서 고치면 될 거라는 약간의 무신경으로 호기롭게 이사를 감행했던 것이다.


굵은 밧줄로 꽁꽁 싸매 있던 철문을 풀고 못질된 현관문을 열어 오랜 시간 사람이 들지 않은 집의 내부를 뜯어보니 우리의 대책 없음에 어이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쿰쿰한 냄새가 가득 찬 집은 그야말로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와 곰팡이가 내려앉은 벽, 싱크대도 없이 뻥 뚫린 시멘트 벽면이 멘살같이 부끄럽던 주방- 싱크대는 왜 없던껄까. 기름통만 뭣에 쓰나 싶지만 훨씬 이전의 세입자가 떼 가버려서 휑한 보일러실, 마당 야외 화장실의 변기를 내부 욕실로 옮기는 공사를 하자는 걸 시골 생활의 한 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말린 나의 불찰!

제주도 느낌이 물씬 나는 돌창고는 이 집에 딸린 밭에서 농사를 짓고 계신 동네 할머니께서 농기구를 보관할 요량으로 사용하고 계셔서 할머니와의 실랑이 끝에 우리는 창고의 한 쪽 구석을 함께 사용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농기구와 비료포대, 어디에 쓰는 건지 모를 물건들이 가득한 창고에서 먼지를 삼키며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그려보려 애썼지만 이사 첫날 창고 작업실에 대한 로망은 곱게 접기로 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아무 때고 밭 할머니께서 마당을 지나 창고를 드나다니시고 밭에서 이것저것 잔뜩 키우셨다.

창고 문제로 우리의 이사를 지켜보러 오셨던 밭 할머니께서 이삿짐 사이에 웬 개 두 마리가 곱게 앉아 있는 것을 보시더니 “너네는 나도 못 타본 비행기를 다 타는구나” 덤덤이 던지셨는데 나는 괜스레 얼굴이 달아올랐다.


여러모로 한숨 나는 광경이었지만 일 년간 살 집을 구하려고 고생을 했던 터라 아무리 생각해도 행운이랄 수밖에 없는 농가주택이어서 심호흡을 가다듬고 우선 방역을 시작했다. 나무 마루에 주먹만 하게 뚫린 구멍이 쥐가 드나들기 딱 좋아보였고  진작부터 농가주택에서 함께 사는 해충 이야기를 괴담처럼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살충제가 구석구석 침투하길 기다리느라 차에 앉아 어디서부터 하얄지 모를 집수리에 번호를 매기며 헤아리니 차츰 현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삿짐이 도착하기 전에 청소라도 끝내 놔야겠단 생각에 미치자 버뜩 정신이 들어서 부랴부랴 벽지를 뜯고, 쓸고 닦고 쓸고 닦고, 문이란 문은 모조리 떼어 몇 년만에 때 목욕하듯 물청소를 시켜주고, 도배를 새로 시작했다. 보일러, 수도, 전기, 인터넷, 싱크대 등 여러 사람이 다녀가니 어느새 밤이었다. 아무리 전문가들이 다녀갔어도 한 번에 해결되는 일은 불가능한 건지 온수가 나오질 않아 제대로 씻지조차 못하고 죽어 있던 집에 겨우겨우 심폐소생술을 하며 며칠이 긴박하게 흘러갔다. 

밤늦게까지 청소를 하고 이삿짐으로 싸 온 이케아 가구를 조립하다 방 한편에 밀어놓고 조립 설명서를 뜯어보며 잠이 드는 날의 연속이었다. 

먼지 속에서 지내느라 노숙자 같은 차림인 데다 차를 타고 밥 먹으러 갈 시간이 없어 중국음식을 배달시켜 도배지를 바닥에 깔고 쪼그려 앉아 먹어야 했다. 핸드폰에선 “제주에 가서 좋아?”라는 메시지가 "까톡, 까톡" 울렸지만 며칠간 외출이라고는 무릎 나온 바지로 철물점에 다녀오는 게 전부였으니 꿈꾸던 제주가 이곳이 맞나 싶었다. 



손에 닿지 않은 곳이 없이 만지고 고쳐서 방바닥에 누워도 께름칙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야 가전도구를 사러 가족이 함께 처음 시내에 나갔다. 중고 가전 상가에 들러 꼭 필요한 것만 골라 샀는데도 필요한 살림이 한둘이 아니었다. 간결하게 살고 싶었지만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일 년을 산다고 없어도 무방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와서 후회되는 한 가지는, 똑같은 냉장고 중에 냉장실 조명이 고장 난 쪽이 오만 원 더 저렴해서 잘만 돌아가면 되지 어떠냐며 냉장고를 탕탕 내리치며 고집부려 샀는데 반찬을 꺼낼 때마다 냉장고 안이 컴컴해서 더듬더듬 조명의 중요성을 매번 확인하는 일이다.

처음부터 간단치 않았던 제주에서의 1년 살이를 왜 시작했을까. 문뜩문뜩 마음에 점점이 떠오르던 물음표.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이 도시의 바쁜 생활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기 쉽지만, 여기 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어떤 ‘때’가 왔던 것처럼 보인다.

삶의 방향이 어긋나는 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누군가는 가끔, 또 누군가는 자주.

차이라면 누군가는 외면하거나 다른 곳에 마음을 털어버리지만, 누군가는 틀어진 곳으로 고개를 기울고 조금씩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에게도 그런 때가 찾아왔던 게 아니었을까.

나는 용기백배한 사람은 커녕 조심조심 사는 사람인 데다 좋아하는 옷은 십 년 넘게 입는 유행에 둔한 사람이지만, 일련의 수고로움과 솜이불 같이 포근한 익숙함과의 이별을 감수하고라도 틀어진 곳의 입구에라도 가봐야만 했다. 그래도 일 년간 이곳에서도 업무를 병행해야 하니 혼자 욕심을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인데 다행히 우리 부부는 노는 것과 마시는 것만큼은 죽이 척척 맞는다. 작당 모의를 하듯 둘이 한참을 준비해서 성사된 이사였다.

집 정리의 마지막으로 가스레인지를 설치했다.

낯선 부엌에 나가 주춤주춤 밥을 안치고 오일장 시장에서 사 온 ‘왕왕’ 스티커가 붙었지만 ‘왕왕’ 크지 않고 동그마니 귀여운 양은 밥상에 단출한 밥상을 차렸다. 가족이 동그란 밥상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따끈한 밥을 지어먹으니 생경했던 공간이 조금씩 ‘집’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두 달은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며 지냈는데 그런 핑계로 나는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처럼 뒹굴뒹굴 보냈다. -요즘 초등학생은 방학 때도 부지런하겠지만 나는 한 마리의 굼벵이처럼 보냈었다.



12시간 넘게 잠을 자고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산책하면 하루가 금방이었는데 게으름이 심각해 보일 때쯤 남편의 한심 반, 걱정 반의 눈빛에 뒤통수가 뜨거웠다.

이제 생각해 보니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했을 테고, 종종 완전히 방전된 느낌이 들긴 했어도 이쯤은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른 세 지난 몇 년간 조금씩 기운이 소진된 상태였던 것 같다.

언제나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다.


게으름이 석 달째 들어서자 내 안의 굼벵이가 아주 자연스럽게 산책길에 본 풍경을 종이에 옮기고 있었다.

누구를 위한 그림이 아니고 그리려고 한 그림도 아닌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듯이 자연스럽게 몸에서 흘러 나오는 그림이 나도 오랜만이라 반가워 반질반질해진 마루 창문에 붙여 놓았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매거진의 이전글 1.프롤로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