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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차연 Mar 29. 2017

5 그리는 것


9,15

아침 일찍 그림을 그리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종이 위를 방황하다 끄집어낸 요셉 보이스의 화집. 어지러이 휘갈긴 그림 같은데도 보고있으면 가슴 한켠이 찡하다.

나도 이런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할수록 부족함을 느낀다.




흐린 날이 계속인 12월이 되고는 뭔가 우뚝 멈춰진 기분이 들어서 손에 잡히지 않는 원고를 끼고 시간을 보낸다. 며칠 그림은 그리지 않고 아무거나 읽고, 영화를 봤는데 12월은 이렇게 보내도 좋겠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좋을, 좋은 글과 좋은 영화를 보고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겨울잠 같은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가만 풍경을 바라보다 보면 자연히 시선은 내면을 향하고 조금씩 나를 단단하게 하는 힘이 생긴다. 그 힘은 다시 외부를 향해 온전히 나인 상태로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가 있다.

내 본연의 속도로 살아간다는 것, 일상에서 떨어져 나와 지나온 나를 바라보고 되짚어보는 시간.

제주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내 방식의 찬찬히 보는 것으로 손으로 옮겨담으며 더디게 내 마음에 새기는 일인 듯하다.



풍경을 보고 그린다고 해서 단순히 종이에 풍경을 옮기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그린 사물이 가진 형체가 아니라 에너지를 그리고 싶다.  

잘 그린 그림보다 그 시간과 공간과 감정이 투영된 그림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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