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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차연 Mar 29. 2017

6. 월양이



9.16

동네에 길고양이들이 보이길래 사료를 세 포대나 샀는데 우리 집에는 오지를 않는다. 

한동안 뒷마당에 가득 채운 사료 그릇을 두고 다음 날이면 비어있길래 고양이가 밤에 몰래 먹고 가나보다 했는데.

웬걸, 민달팽이의 짓이었다! 이곳은 습도가 높아서 통통하고 짧은 지렁이 같이 생긴 민달팽이와 손가락 만한 지네가 종종 보이는데- 최근에는 욕실에서 육지 플라나리아도 목격했다. 

집 안만큼은 들어오지 않게 하려고 아침에 갈아먹고 남은 커피 가루를 마당에 뿌리면서 의도치 않게 키우고 있던 셈이었다. 사실을 알고 오지도 않는 고양이 사료 주기는 멈췄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작고 볼품없이 마른 아기 고양이가 마당 수풀에 숨어 가랑가랑 울고 있었다. 엄마와 부랴부랴 사료를 들고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 녀석을 달래 보려 했지만 경계가 심해서 우리가 문 뒤로 숨고 나서야 살금살금 나오더니 자그마한 녀석이 많이도 먹고 사라졌다. 

손바닥만 한 몸집에 희고 노란 털을 가진 우리 집 첫 고양이 손님을 월령리에서 만났으니 월양이라고 이름 지어줬다. 





9,19

마당에 고양이가 왔길래 재빠르게 사료를 들고나갔지만 그 사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사료를 들고 나온 김에 어제 본 새끼 고양이가 생각나서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삼거리에서 전에 본 적 있는 점박이 녀석에게 사료를 나눠주고, 마을 입구 담 위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얼룩무늬 녀석은 바닥에 사료를 살살 뿌려도 못 본 척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더니 홀짝 내려와 허겁지겁 먹는다. 얼룩이를 닮은 더 작은아이가 사료 쪽으로 걸어 나오길래 따로 사료를 뿌려놔 주었더니 이 녀석도 홀쭉한 배로 허겁지겁이다. 지켜보다가 자리를 뜨려니까 먹다 말고 내 쪽을 말똥 바라보는 게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연못 근처에서 아기 고양이 세 마리를 보았는데 어쩐지 안 보여서 집으로 발길을 옮겼더니 어디선가 여린 울음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쫓아보아도 고양이는 보이질 않는데 선인장 밭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선인장이 보기에는 예뻐도 가시가 어마 무시하다. 

몇 주 전 택시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뎌 휘청하면서 종아리에 선인장이 살짝 닿았는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솜털 같은 가시가 얼핏 봐도 100개는 될 정도였다. 그 뒤로 각별히 조심하는데 그 작고 여린 녀석이 선인장 밭 어딘가에서 울고 있으니 집에 와서도 마음이 안 좋다. 

밤새 우는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굶주린 '사람'에 빗대는 이도 있겠지만 

나는 다만 모든 어린것들이 배를 곪지 않았으면 좋겠다. 









12,24

우리 식구들은 요즘 마당에만 나가면 입으로 야옹야옹 소리를 낸다. 화장실이 밖에 있으니까 야옹야옹 소리가 심심하면 들려온다. 우리가 야옹 하면 어디선가 야옹- 답하면서 월양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양이 언어로  서로 안부를 확인하는 셈이다.  

종종 마당의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길래 신기했는데 며칠 지켜봤더니 딱하게도 다른 길고양이들 때문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 우리 집에 올 때만 해도 손바닥만큼 작고 못생겨서 멀찌감치 떨어져 울기만 하더니 지금은 포동포동 살이 오르고 제법 인물 났다. 어쩌다 무리를 잃어버린 건지 혼자 어쩔 줄 모르던 게 대견한데, 월양이에게 주는 사료 때문인지 동네 커다란 길고양이들이 우리 집 마당을 서로 차지하려고 수시로 출몰한다. 낮에 또 큰 고양이 두 놈이 다녀간 후로 밤에 보이질 않길래 걱정되어서 마당에서 불러보았더니 우리 집 지붕 위에 ‘안녕하세요’라고 써서 간판처럼 올려 둔 나무판자 뒤에서 숨겨뒀던 얼굴만 쏘옥 내민다. 

정이 들면 어쩌냐고 걱정하던 남편은 이름도 지어주고 시도 때도 없이 마당에서 어울리지 않게 ‘야옹’ 거리고 있다. 





4,27, 수

월양이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다만 잘 자라주기만을 바라 왔다. 경계가 심하던 월양이가 우리 집 마당에 찾아와 사료를 먹으며 계절이 바뀌고 이제는 문 앞에 드러누워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일로 아침을 시작한다.  고양이를 싫어하던 남편은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런 마음이 길가의 작은 동물에게도 애정의 눈길을 보내게 해주어 작은 동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게 되었다. 이렇듯 누군가를 신뢰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은 내가 속한 세계를 넓히는 일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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