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주 생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차연 Mar 29. 2017

7 제주 가을


9,6

한층 가을이 다가와 아침저녁으로 서늘하고 무엇보다 하늘이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 높고 짙다. 

되도록 해 질 녘엔 꼭 바다에 나가려고 다짐하고 있다. 

똘이를 데리고 금능에서 협재까지 걷다 왔다. 어둡기 전 해변에는 두런두런 사람들이 있지만 휴가철 때 와는 달리 들뜬 느낌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볕이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고 가만 서있었다. 

똘이는 지난번 해변을 산책하면서 만난 파도가 무서웠는지 이제 바닷가 쪽으로는 가려고 하질 않는다. 바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모래에 발이 파 붙여가며 걷는다. 서늘한 바람과 자그마한 발자국이 우리 뒤를 쫓는다. 

해 질 녘 분홍빛이 보랏빛으로 바뀌던 하늘이 며칠이더니 낮 동안에 파랗기만 하다 얌전히 밤이 내리는. 

어느덧, 가을이다.


 9,18

서울에서 작은 이모가 와서 엄마가 바쁘다

서울에 다녀오고 미뤄둔 일을 하느라 남편과 나는 방에 붙박여 바쁜데 엄마 혼자 마루를 서성일 때면 마음이 쓰였는데 다행이다.

아침부터 엄마 방이 시끌시끌하더니 이모와 두런두런 약초를 캐러 나갔다. 대체 의학에 관심이 많은 이모는 제주에 오자마자 약초 찾기로 바쁘다. 바닷가의 이름 모를 풀들과 길가에 흔한 풀들이 제각기 이름이 있고 쓰임이 있는 약초란다. 다른 곳에서는 구하기도 힘든 약초들이 아무렇게나 길에 널려 있는 걸 우리도 모르고 지냈다. 

방 한쪽 모서리에 자그마한 다시 팩에 지네가 그 냄새를 싫어해서 쫓아준다는 삼백초를 놓아뒀다. 덕분인지 여름내 출몰해서 우리를 놀라게 하던 지네의 등장이 뜸해졌다. 이제 찾아보니 삼백초는 사람한테는 거의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는 효능이 있다. 그냥 보면 마른풀일 뿐인데 적혀 있는 효능이 신기해서 손으로 주무르며 풀 냄새를 맡아본다.

이모는 필요한 약초들을 캐와서 내내 창고에 널어놓고 바삭 말리더니 돌아갈 때는 케리어에 마른풀들만 잔뜩 담아갔다. 


9,20

일어나서 세수만 하고 자전거를 꺼내어 혼자 무작정 달렸다.

차로 자주 지나다닌 길이라 낯설지 않은 동네들을 지나 차로는 가기 힘든 골목길을 돌아 해안가 자전거 길로 향했다. 아침부터 밭에서 일하는 손길들이 바쁘다. 마을 깊이 들어갈수록 제주민들이 사는 집과 옆에 딸린 밭이 많이 보인다. 자기가 먹을 것을 집 옆에서 경작해서 먹는 삶.

제주에 산다면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내가 먹을 만큼의 밭을 일구며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농사를 짓는 일은 무엇보다 자연스레 사는 일이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 그 날의 날씨에 따른 삶을 사는 사람들과 비슷비슷하게 일생을 보내고 싶어 졌다.

며칠 전 동네 할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경작하시는 밭을 쉬고 있으니 거기에다 콩도 심고 무도 심어 먹으라셨다. 우리는 옆집에서 빌려 준 조그만 밭도 벅차서 정중히 사양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니 할머니께서 우리가 계속 이 동네에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러신 것만 같아 죄송스럽다.

인적이 드문 밭에서도 물줄기는 바쁘게 돌아간다. 그 광경이 이상하리만치 아름다워 자전거를 세우고 한참을 바라보다 고불고불한 길을 찾아 나왔다.




9,23

내일이면 이모가 서울에 돌아가서 가까운 새별오름으로 향했다.

분명 차로 여러 번 지나다닌 길인데 뭔가 다르다 싶더니 도롯가를 따라 늘어선 억새 때문이었다. 여름에는 눈길 주지 않던 억새들이 많이도 줄지어 흔들거렸다.

새별오름은 봉긋 솟은 오름으로 억새풀이 무성하다. 대보름에는 여기서 들불놀이를 한다니 지금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아 그때 또 와봐야겠다 싶다.

초가을의 억새는 줄기는 초록인데 아직 다 벌어지지 않은 잎은 분홍빛이 나는 줄 처음 알았다.

억새에서 사르락 사르락 바람 소리가 났다.





9,26

올 추석은 조용조용 제주에서 지내기로 해서 별다른 준비랄 게 없지만, 그래도 명절 기분을 내고 햅쌀도 살 겸 한경면 하나로마트에 장을 보러 나갔다. 

월령리는 한림읍의 끄트머리라 바로 조금만 걸어나가면 한경면이다. 

서울 사람인 우리는 ‘읍’과 ‘면’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었는데 동네 아저씨는 그래도 읍에 살아야 된다며 자부심을 내비치셨다. 

그 읍에 속한 옆 동네 두모리는 옹기종기 가게들이 즐비한 이름도 예쁜 작은 시골 마을이라 한눈에 반한 곳이다. 도로를 따라 상가들이 형성되어 있어 전체가 다 두모리인 줄 알았더니 중간쯤부터는 신창리란다. 

마트 가는 길에 마을 구경을 하다가 떡집이 보여서 들어갔다. 꽤나 장사가 잘되는 집인지 주문받은 박스 사이로 아주머니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사이에서 어리바리하게 겨우 송편을 사서 돌아왔다. 

제주 송편은 흔히 먹던 송편과 달리 하얗고 동그란 모양으로 안에는 완두콩이 들어있다. 한 손에 들어오는 동그란 떡이 꼭 보름달을 닮았다. 

양창옥 할머니께 마트에서 산 전병 선물세트를 드리러 댁에 들렀다. 처음 뵌 작년에 비하여 눈에 띄게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요새는 댁에 누워만 계신다. 우리가 종종 찾아갈 때마다 뭔가를 주고 싶어 하시는데 오늘은 손수 챙겨주기가 어려워 우리한테 찬장에서 뭘 꺼내 가라고 성화 시길래 하는 수 없이 탁자 위의 귤을 주먹 가득 집어오고 마당에 심어진 파 세 뿌리를 뽑아왔다. 

보름달을 보며 할머니의 건강을 빌어드려야겠다.

 



10,2 

제주에 내려온 지 삼 개월쯤 지나자 주위 사람들이 종종 외롭지 않으냐고 물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당장은 “ 바로 옆이 관광지고 sns도 있어서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의아한 것이.

어쩌면 나만 빼고 사람들은 도시에 살아서 외롭지 않았던 걸까? 

오히려-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9월이 돌아오면 늘 우울감에 시달려서, 모든 것이 잘 흘러가는 만족스러운 나 날일 때도 끝도 없이 감정이 가라앉아 어찌할 줄을 모르면서 한 달을 버티고 시월이 되면 조금씩 나아졌는데 지난 9월은 그런 생각을 해 볼 틈도 없이 지나가버렸다.

어쩌다 우리 집에서 며칠씩 머물다 가는 친구들이 반갑고 즐거운데도 느릿느릿 조용하게 흐르고 있는 이곳의 시간은 여행 온 친구들의 들뜬 기운에 쉽사리 흐트러져버린다. 그래서 무뚝뚝하고 서툰 나에게 많지도 않은 친구들이 찾아오는 게 기쁘지만, 사람들이 돌아간 다음 날이면 멍하니 더듬더듬 어디쯤인지 한참을 헤매고는 한다. 

저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려면 외로움 속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지금의 생활은, 외로움이 내 살처럼 자연스럽고 하루의 모양이 둥글고 보드랍다.


10,8

제주는 스케일이 다른지, 페북에서 우연히 본 하루짜리 워크숍이 천연 미장 배우기이다.

손재주는 직업상 내가 조금 낫지만, 평소 덜렁대는 나보다 꼼꼼한 성격의 남편이 그런 일에 잘 맞아서 남편이 미장을 배우는 동안 나는 느긋하게 그 동네를 산책하러 나섰다. 한참을 걷다가 담이 없는 작은 초등학교가 예뻐서 나무 그늘에 앉아 옹기종이 모인 아이들을 바라봤다. 먼지를 뒤집어쓴 아이들의 얼굴이 올망졸망한 돌멩이들처럼 반짝 빛난다. 

짧은 여행길에서, 차 안을 스쳐 지나가는 고불진 골목에 숨겨진 이야기들과 마음을 끄는 낯선 풍경들을 한순간에 지나가버리면 한켠 아쉬움이 일고는 했다. 그렇다고 매번 차를 멈추고 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쉬움의 퇴적이 지금의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건 아닐까. 그런데 막상 차를 두고 걸어보니 내 느릿한 걸음으로는 많이 가보지도 못하고 지쳐버린다. 반복되는 비슷한 풍경과 따가운 가을볕과 인적이 드물어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어깨, 걷다가 눈을 질끈 감게 되는 죽어있는 작은 것들을 보았다. 

'하루'라는 시간도 마찬가지로 더딘 반복의 연속인데 행복은 찰나의 조각이라서 우리는 순간을 간직하면서 애써 내일을 살아가나 보다. 지금이라고 날마다 즐겁고 행복하지 않지만, 살아가는 힘이 될 그런 작은 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놔야겠다.

어느 틈에 흩날려버리거나 소진되는 것들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딱딱하고 냉랭해지는 마음에 그런 기억을 간직했던 공간만큼은 어느 쯤 데워져 있을 테니까. 

워크숍이 끝나고 양 손에 파란 물이 든 남편과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집으로 향했다. 

10,12

주방 창가에 놓인 물컵에 담아 둔 아보카도 씨앗이 단단한 껍질 틈으로 새싹을 피워냈다.

나는 아보카도를 자를 때 그 둥글고 딱딱한 씨앗이 여간 번거로워 씩씩거리며 버리고는 했는데 여린 연둣빛 생명을 피워냈으니 새삼스러워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았다.


10,19

오늘 할머니의 부음을 들었다.

수년간 병상에 누워 계셔서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잠결에 전화를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위독하시다는 얘기를 듣고 며칠 전 서울에 다녀간 길에 병원에 잠시 들려 다행이다.

작년부터 깨어있지 않으셔서 나는 어쩐지 마른 나뭇잎 같던 할머니를 다시 마주하기가 두려웠는데, 며칠 전 뵌 할머니는 아기 같은 모습이셨다.

감은 눈으로 어딘가를 헤매시는 듯했지만, 말간 모습이 어쩐지 편안해 보이셨다. 그래서 작년에 위독하시단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이렇게 더 자리를 지키시겠구나 하고 내려왔는데 이제는 편안하게 갈 길을 가셨나 보다. 

할머니는 이상하게도 손주 중에 나를 예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나는 철이 들면서 점점 발길이 뜸해졌다.

연년생인 오빠는 너무도 아끼셔서 오빠 생일이 돌아오면 떡이며 고기를 잔뜩 준비하시고 시장을 가도 오빠가 좋아하는 것들만, 용돈도 오빠만, 언제나 오빠만 보고 싶어 하셨다. 유일하게 나를 챙겨주신 게 내가 상추쌈을 잘 먹는다며 사 오시던 상추였다. 내가 어릴 적에 미국으로 가셔서 기억이 별로 없는 외조부모님보다 항상 오빠보다 못한 취급을 받던 나는 친할머니에게 늘 서운했다. 그것도 커서야 일이지 순둥이던 어린 시절엔 당연한 처사인가 보다 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게 따뜻했던 적이 없던, 어린 시절에 또 다른 큰 구멍을 만들어 놓으신 분이 이제는 내가 있는 이 세상에 안 계신다. ‘죽음’은 언제나 당혹스럽게 나를 어리고 슬픈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까만색 셔츠를 사러 유니클로에 다녀오면서도 묵직한 추가 매달린 듯 어두운 구멍으로 가라앉는다.

며칠 전 할머니를 뵙고 오지 않았으면 오랜 병상 생활로 지친 모습만 마지막으로 기억했을 텐데, 그러면 나는 내 안의 구멍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을 텐데, 아기처럼 작고 여린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뵙고 와서 다행이다.

청명하고 좋은 날 할머니께서 하늘로 가셨으니 평안하게 영면하시리라. 


10,25

할머니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 미뤄 뒀던 일을 마무리하느라 며칠을 책상에 묶여 있었다. 

제주 와서 일하는 게 억울하기도 하지만, 여행 온 게 아니라 일상을 보내러 온 거니 별수 없다. 

다행히 오늘은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잠시 혼자서 빈 공터 같은 시간을 가지려고 타박타박 걸어 나왔다. 돌담과 농가 주택의 파란색, 주황색 지붕들, 빨래가 팔락이는 빨랫줄, 파란 하늘이 펼쳐진 창 밖을 응시하며 조용히 시간이 흐르는 걸 바라본다. 

주말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여행객들이 북적인다.  

남편은 일요일마다 옆 동네에서 제주분이 하시는 낚시 교실에 나간다. 한창 바다낚시에 빠져서 낚시 교실이 없는 날에도 낚싯대를 둘러매고 집 앞 바닷가로 나서는데 나는 낚시에는 흥미가 없어서 그때마다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10,27

일 년 중에 가장 좋은 시월인데 작년에 받아 둔 일을 하느라 여전히 방에 콕 박혀서 지내고 있다. 

서울에서 연락이 오면 "좋겠다 좋겠다" 그러지만 바다보다 더 많이 보는 게 책상 위 모니터인 요즘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한 가지는 6시 조금 전부터 시작되는 낙조 관람 동네 산책길이다. 툭하면 지나는 짧은 길인데도 질리지가 않는다. 

동네 입구에 있는 작은 연못과 한 마리뿐인 외로운 오리가 잘 있나 둘러보고 우리가 처음에 이사할 뻔한 파란색 지붕의 시골집을 지나쳐 수확 철이 다가올수록 하나 둘 많아지는 빨간 선인장 열매도 세어본다. 

양창옥 할머니 댁을 지날 때 면 뭐하고 계신가 슬쩍 보면서 부쩍 안 좋아지신 건강을 빈다. 삼거리 할머니 댁에 새로 낳은 강아지 새끼들은 부르면 깡충깡충 세 마리가 신나서 달려온다. 어디 수풀에서 놀았는지 털 사이에 풀들이 박혀서 떼줄래도 호들갑을 떨어서 떼줄 수가 없다. 까만 강아지 세 마리가 똑같이 생겼는데 가슴에 하얀 털의 모양만 조금씩 다른 게 여간 귀엽지 않다.  

그 시간의 하늘은 매일, 매시간, 매분이 다른 게 참말 신기하다. 

서울에서도 사람 잘 안 다니는 언덕 위에 산을 끼고 사는데도 이렇게 하늘의 모습이 다양한 줄은 처음 알았다. 

분홍색과 보라색이던 하늘이 파란색과 보라색이 됐다가 하늘색이 됐다가 주황색이 됐다 빨간색이었다 어느 순간 급히 검은 밤이 내린다. 그 사이 바다 위에서 출렁이는 은빛 조각들도 하늘을 따라 시시각각 색을 바꾼다. 

동네 낙조 명소인 평상에는 해가 지면 할머니들이 모여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시는데 내가 특징 없게 생겼는지 매번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신다.  

요즘엔 무엇보다 아직 밝은데 일찍 나온 초승달이 걸린 파란 하늘이 가장 예쁘다. 그렇게 짧은 산책을 마치고 들어오면 주름진 마음도 조금 펴지고, 하루의 마감이 실감 나서 오늘 일을 내일로 미뤄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다. 그 사이 초승달도 조금조금 위치를 바꿔 작업방 창문에 바짝 기대면 창틀에 살짝 걸쳐 있다. 살짝 미소 짓는 예쁜 초승달을 보면 내일이면 또 어떻게 되겠지 싶다. 

오늘은 일 그만- 

퇴근이다! 


10,28

짧은 머리를 고수하는 남편은 머리카락이 조금만 자라도 잔디 인형 같아져서 서울에서도 한 달이 못돼 이발을 해야 했다. 제주에 오면 내가 이발을 해주겠다며 호기롭게 가정용 미용기를 챙겨서 내려왔는데 처음엔 영 손에 익지 않아 둘이 옥신각신. 여름에 마당에서 이발하느라 온몸에 바늘 같은 머리카락이 붙고 난리가 났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나름 순서를 가지고 뒷마당 1인 미용실을 열었다가 금세 말끔하게 영업을 마친다. 

의자와 미용기, 보자기, 거울을 가지고 빨기 직전의 옷으로 갈아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뒷마당 그늘에 가서 남편을 앉혀놓고 10분이면 이발이 끝난다. 남편이 '월령리 블루클럽'이라고 이름 지어 줬는데 내년이면 다시 아파트로 갈 테니 이 손기술이 아까워서 어쩌나. 




10,29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이었는데 수요일 밤에 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날씨가 가을에서 겨울로 깡총 넘어가버렸다. 이대로 가을이 가버리면 어쩌나 싶어 가까운 오름으로 향했다. 

여름엔 바다가 마냥 좋아 몰랐는데 이 계절이 되고 보니 제주의 좋은 숲과 오름은 동쪽에 더 많았다. 그래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은 고민 끝에 바리메 오름으로 향했는데 가벼운 차림으로는 오르기가 쉽지 않아 그 옆의 노꼬메 오름으로 발길을 돌렸다.  입구에 이미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30명 가까이 시끌시끌이다. 평일인걸 감안하면 학교에서 시킨 오름 오르기 정도 같아 보인다. 

핸드폰으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르는 아이들 사이에서 “아, 올라가기 싫어”라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우리는 조용히 걷고 싶어 아이들이 우리 앞을 지나고 난 뒤에야 천천히 움직인다. 

인터넷에는 분명 가벼운 언덕쯤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등산인들이 생각하는 ‘가벼운’,’ 언덕’ 이였던 건지 오르기가 ‘가볍지' 가 않다. 

몇 달 사이 몸이 불어서, 작년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다녀온 사람이 맞는가 스스로도 의심이 들 정도로 몸이 둔하다. 물이라도 한 통 가져올걸, 등산화를 신고 올걸 후회를 거듭하다 다시 내려갈까 말까 하는 기로에서 조금만 더 참자 싶어 걸었더니 바로 앞이 정상이 펼쳐진 언덕 위였다.   

제주의 가을답게 언덕 위는 억새가 무성하다. 날씨가 좀 더 맑았으면 사방이 다 내려다 보였을 텐데 날이 흐려 시야가 맑지는 않았지만, 확 트인 풍경에 그간 쌓여온 티끌들이 날아가는 듯하다. 모습은 안 보여도 앞서서 시끄럽게 떠들고 노래하던 아이들은 이미 정상에 서서 깔깔거리며 각자의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조금 지쳐서 잠시만 정상에 머물다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혹시 다칠세라 발을 조심조심 디디며 내려오는데 뒤늦게 하산하는 아이들이 우리를 앞질러 뛰어 내려간다. 한 아이는 한쪽 발에 깁스까지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촐랑촐랑 토끼같이 뛰어 내려간다. 

우리는 흙냄새를 맡고 땅을 밟으며 초록을 눈에 간직하면서 조금씩 일상에서 처진 기운을 얻어가는데, 숲은 햇살같이 명랑한 아이들이 헐떡거리며 뛰는 모습에 좀 더 살아 숨 쉬는 느낌이 든다.  




10,30

택배로 배송 온 기름 난로를 거실 중앙에 설치했다. 

난로는 오랜만이라 사용법이 가물 했는데 이리저리 눌러보니 금세 마루가 후끈해졌다. 

난로를 켜고 위에 양은 주전자를 올려놓고 뜨거운 차를 끓이는 장면을 상상했지만 요즘 나오는 난로는 안전상의 이유로 상판이 뜨겁지가 않았다. 게다가 욕심내어 30평용을 샀더니 한 시간이 못되어 땀이 뻘뻘 나서 껐다.

바람 많은 제주답게 요 며칠 바람이 무섭게 분다. 

아직은 당황스러운 이 추위에 적응되지 않아서 며칠 집에서 나가지 않고 있다. 

오늘이 그중에 '가장' 추운 날씨다. -아마도 계속해서 갱신되겠지.  

온실 속 같은 아파트에서 지내다 문이 덜컹거리는 시골집에 오니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벌써 겨울이 걱정이다. 그래서 아침부터 가까운 사람들과 휴대폰 너머로 감기 조심하라는 안부인사를 나눴다. 

아침이면 외부에 있는 화장실의 덜컹거리는 샷시문이 바람에 떨어져 나가지나 않았는지 용무를 겸해 살펴본다. 4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제주와 정이 잔뜩 들었는데 ‘겨울 추위’에 마음이 시들해지려나? 

그것도 지내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다. 

다만 오늘은, 마루 중앙의 커다란 기름 난로와 넘쳐나는 귤, 새로 깐 촘촘한 꽃무늬가 박힌 면 카펫으로 우리 집이 한결 따뜻해졌다. 조금 뒤면 잔뜩 옷을 껴입고 난로에 둘러앉아 호호 불며 고구마를 먹는 풍경이 펼쳐지려나. 


10,31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의 마지막 날이다. sns에는 할로윈 사진이 넘쳐나는데 우리 집엔 앞집 할머니가 늙은 호박을 나눠주고 가셨다. 

뒷마당에서 키운 늙은 호박이 꽤 큰데 동네 할머니께서 주신 호박이 오늘 것까지 두 개여서 커다란 호박이 세 개나 생겨 호박 부자가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6. 월양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