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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차연 Mar 29. 2017

8 제주 생활

약을 진지하게 뿌렸더니 지네가 나오지 않고 있다. 

벌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이제 해충을 잡아먹는다는 거미와 그리마는 잡지 않고 모른 척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설거지를 하다 수세미를 넣는 통에 붙은 손톱만 한 달팽이를 보았다. 못 본 척했더니 열심히 가는데도 계속 그 자리인 건지 삼일 내내 붙어있어 난감하다.



지난번 독서 모임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제주에 이주한 내 또래의 여자들을 만날 기회가 적었어서 좋다. 아직 만난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이렇게 말하기가 조심스럽지만 대부분 잠깐만 대화를 해봐도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라서 신기하다. 지척으로 오가면서도 서로 모르고 지내던 사람들을 이곳에서 우연히 알게 되고 어쩌면 일찌감치 만났을지도 모를 가까운 인연에 놀라고는 한다.

남편은 버스정류장에서 드럼 교습 전단지를 보더니 드럼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찾아가 봤다. 금능 석물원 입구에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햄버집이 있는데 그곳의 버거 냄새를 온몸으로 들이켜며 뒤로 돌아가니 농작물이 널려 있을 것 같은 비닐하우스- 실제로도 미역이 널려 있었다. 안에 작은 칸막이 방에서 개인 교습을 해주고 있었다. 너무도 친근한 곳의 뒷문을 열어보니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듯한 곳이어서 재밌었지만, 나는 금방 돌아 나와 차 앞에 서서 기다렸는데 우렁차게 드럼 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 보니 결국엔 배우는구나 싶었다. 



5,12

처음에는 장보기가 영 불편했다. 차로 15분은 나가야 작은 마트가 있고 한림 오일장은 매달 4,9로 끝나는 날자에만 열린다. 섬의 물가는 생각보다 비싸서 어떤 것들은 비싼 배송료를 물더래도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게 더 싸기도 하다. 자기 밭이 있는 사람들은 웬만한 건 키워서 먹으니 관광지 물가로 살림을 하려는 게 쉽지 않다. 

그나마 오일장이 마트보다 저렴하고 제철의 싱싱한 채소들을 살 수 있어서 이주에 한번 정도 날자를 꼽았다가 오일장에 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살림이 익숙해지니 오히려 음식물을 잘 활용하게 된다. 필요한 것들과 해먹을 것들을 적어서 장을 보고 메모지를 냉장고에 붙여놓고 식자재를 빼놓지 않고 해 먹다 보면 어느새 다음 장이 서는 날이 돌아온다. 게다가 봄이 되고는 일주일 넘게 장을 보지 않고도 집 앞의 작은 밭에서 난 부추, 상추, 냉이 등을 캐서 밥상을 차렸다. 엄마는 쑥도 캐와서 처음으로 쑥개떡을 동그랗게 빚어 먹었다.

마트에서 팩에 담긴 깨끗한 토막의 채소만 보다가 흙이 잔뜩 묻은 나물을 손질하는 게 손이 많이 가서 번거롭고 어렵지만, 먹거리의 과정을 안다는 것은 식탁 위에 우리의 시간과 이야기들을 쌓아가는 것 같다. 


1,11

참고 참다가 모르는 척까지 해보다가 결국은 읍내 미용실에 머리를 하러 갔다. 

평소에도 미용실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세 달에 한 번 갈까 했는데 시골에서 주로 집에 있으니 나를 꾸미는 데는 최소한의 신경만 쓰며 지낸다. 우리 집 엥겔지수가 부쩍 올라간 게 동네 어른들께 얻어먹는 브로콜리 때문이 아니라 미용비가 밑바닥까지 찍고 있어 상대적인 탓이었나 보다. 남편의 미용은 내가 담당하면서 기술이 점점 늘어 이제는 날이 추워서 미용실에 가서 자르랬더니 잘못 자르면 어쩌냐고 내가 잘라줘야 된다며 전용 미용기술자의 자부심을 심어줬다. 그러다 보니 여름에 커트로 잘랐던 내 머리가 어느새 단발이 되더니, 사람보다 강아지들이 미용을 더 자주 하는 현재에 이르러 아침마다 부스스한 머리를 보면서 자존감이 떨어지는 사태에 이르러서야 겨우 읍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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