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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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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차연 Mar 29. 2017

9 집


언제나 공간에 대한 애착이 컸다.

내 방을 가지지 못했던 어릴 적엔 운동장에 집의 평면도를 그리고 선으로 나눠진 방들을 다니며 놀았다. 

결혼을 하면 주택에 살고 싶은 로망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엄두가 나질 않았다. 게으른 우리에게는 그나마 산 옆의 아파트가 최선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아파트도 나에게 맞춤한 공간이 필요해서 무리해서 내부를 싹 뜯어고쳐 안방은 책상만 둘러 쌓인 방이 되었고 뻥 뚫린 주방엔 가벽을 세워 여덟 명이 앉을 수 있는 식탁 테이블을 들이고 거실에도 커다란 테이블이 중앙을 차지해서 어느 방에서도 그리거나 읽거나 보거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요란을 떨었어도 자그마한 마당이 있는 주택에 대한 짝사랑은 여전해서 이왕 제주도에 내려가 살 거면 주택에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농가 주택에 살면서 우리가 점점 변해간다. 

사람이 살지 않아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아 죽어 있던 집에 사람이 들어오니 따뜻한 공기가 흐르고 창밖엔 온통 돌담과 초록으로 둘러싸였다. 사방에 난 창으로 해가 들어와 아침을 환하게 두드린다. 일찍 일어나면 침실 창밖에 줄지어 자란 호박 줄기에 노오란 꽃들이 별 모양으로 활짝 피어있다. 아주 잠깐 뿐으로 금세 노오란 얼굴을 감춰버려서 쪼글쪼글한 꽃봉오리 모양으로 하루 종일 잠잠이다. 어느새 호박도 둥글고 묵직하다.

꽃에 조그만 열매가 다섯 개가 맺었는데 제대로 자라는 건 딱 두 개라 아끼느라 못 따먹고 있다. 

지낼수록 신기한 것이 집이 사람이 사는 걸 아는 모양인지 뒤뜰에 안 나던 호박이 나고, 몇 년간 열매를 맺지 않던 마당 감나무엔 파란 감이 많이도 달렸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고 귀여운 광경이다. 

밤이 되면 방 깊숙이 어둠이 찾아오고, 엄마 방 네모난 창문 안으로 예쁘게 달이 뜬다. 방 안에서 온전히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되어서 시계를 점점 더 보지 않게 되었다. 

낮에 문을 다 열어 놓아도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오히려 아파트보다 거리낌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아파트에서는 보이지 않는 시선도 의식해서 반나절은 커튼으로 가려놓고 지냈는데 말이다. 

살아보지 않으면, 이미지로 그려보는 것으로는 알기 어려운 소소한 것들을 찾는 게 재미있는 요즘이다. 

밤에 화장실에 가려고 신을 신고 마당에 나오면 지붕 위를 뒤덮은 별들이 초롱초롱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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