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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제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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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차연 Mar 29. 2017

10 제주 겨울



11,7

온천에 가려고 했는데 어젯밤부터 비가 흩날리다 종일 내리는 비가 심상치 않다.

운치 있게 비를 맞으면서 야외 온천욕을 할까도 싶었지만 그야말로 비가 ‘쏟아지니' 아예 밖에는 나가지도 못하고 김치전을 해 먹으면서 낮 시간을 보냈다. 

이제 어느 정도 적응된 이곳의 눅눅한 하루가 이렇게 가겠구나 싶더니 저녁쯤에 비가 뚝 그쳤다. 

왠지 비 오는 날은 끊임없이 밀가루 음식이 당기므로 한림읍의 중국집에 가서 조촐히 고량주에 탕수육을 먹었다. 읍내에서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라 잔뜩 기대했는데 탕수육이 너무 달아서 실망했다. 입안 가득 단맛을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도 배가 꺼지지 않아 남편과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오랜만에 방파제까지 나가봤지만, 날씨 탓인지 그 많던 낚시하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들어가기는 아쉬워서 바닷길을 둘러 걷는데 비 갠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촘촘히 반짝이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동네 구경을 했을 텐데 오늘만큼은 하늘 가득한 별구경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때, 그 많은 별 중에 어여쁜 하나가 바다로 뚝-.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별똥별이라 어어- 소리만 내면서도 다행히 찰나를 놓치지 않고 소원을 빌었다.  

그 0.5초 정도의 순간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아아- 예쁜 광경. 

별이 그린 포물선을 가슴에 아로새기며 집으로 돌아오면서 여러모로 섭섭했던 하루가 예쁘게 마무리된다. 


11,8

입동.

비 오는 날에도 작은 기쁨이 될만한 것들을 준비한다. 

현관 위에 달아 둔 풍경 소리가 빗소리와 어울려 참 좋다.


11,12

온라인으로 구매한 팔다리에 구멍이 뚫려있는 입는 침낭과 털 슬리퍼가 도착했다.

월령에서 아마도 우리 집이 택배가 가장 많이 오는 집이겠지. 월령에는 하루에 많아야 두 개 정도 배달되는 택배라서 예상보다 며칠씩 늦어지고는 한다. 택배 기사님이 이른 아침에라도 도착하는 날이면 현관문을 벌컥 열고 마루 끄트머리에 택배 상자를 놓고 가는 일은 이제 적응이 되었다. 

나머지 택배 물품들이 다 도착하면 우리 집에서 나 혼자 겨울 여행이라도 떠나야 할 것 같다. 






11,5

제주에 처음 내려왔을 때 흔하게 보이던 제비도 덜렁 빈집만 남겨두고 보이지 않고 아침마다 지저귀는 새의 울음이 달라졌다. 월령리의 선인장은 노란 꽃을 떨구고 자줏빛 열매들이 방울방울 달렸다. 열매가 붉어지는 걸 보니 백년초 수확 철이 다가오나 보다. 맑고 눈이 시리게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가을과 함께 짙어지고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 보인다. 

지금 제주는 어딜 가나 공사하는 곳이다.  

우리 집 뒤에만 해도 제법 큰 규모의 리조트가 완공을 앞두고 있고, 듣기로는 레미콘이 부족해 건축주들이 자기 순서를 기다리는데 한 달은 넘게 걸린단다. 조용한 시골 생활을 그리며 내려왔는데, 알려질 만큼 알려진 들썩이는 제주 부동산 때문에 앞으로도 얼마간은 이런 풍경이 계속될 것 같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제주는 아직도 푸르고 아름다워 내 욕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나도 슬쩍 미안한 마음이 인다.  


11,17

한창 바다낚시에 빠져서 낚시 얘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는 남편이 며칠째 비가 계속 내려 낚시에 못 가서 입이 나와 있다. 나는 동백꽃을 보러 가려던 참인데 요사이에 꽃이 다 떨어질까 봐 노심초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고 나면 밭에 키우는 무, 배추, 고수가 하루 만에도 한 뼘이 커 있다. 


11,18

허리가 아픈 엄마를 읍내 한의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려다 부슬부슬 비 내리는 한림항이 눈이 밟혀 차를 세웠다. 조항을 끝내고 정박한 배 앞에 알록달록 비닐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물에서 물고기를 건져낸다. 갈매기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바람에 나뭇잎처럼 날린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솜이불 같은 구름이 머리 위로 낮게 깔렸다.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을 바라보다 손으로 기억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빗방울 가운데 노트를 펼친다.




11,21

앞집에는 은퇴하신 노부부가 사신다. 대구에서 제주로 내려오신 지 이 년쯤 되셨다는데 두 분 다 조용조용 집에만 계셔서 동네 사람들과 교류가 많지 않다.

우리도 이사 온 지 몇 달 만에 제대로 얼굴을 뵙고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아침부터 두 분께서 밭에 나와 고구마를 캐고 계시길래 우리 가족도 팔을 걷어붙이고 호미를 들었다. 밭에 쪼그리고 앉아 흙냄새를 맡으며 처음 고구마를 캤다. 올해 잘 되지 않았다는 고구마는 얇고 길쭉하게 생겨서 아무렇게나 돌 사이에 박혀있어 생각보다 쉽지 나오지 않았다. 두어 시간 동안 고구마를 다 캐고 나니 할머니께서 고맙다며 고구마 한 봉지를 싸주셨다. 

저녁으로 고구마를 쪄먹고 책상에 앉아 모양이 온전한 것들을 골라내어 따로 포장했다. 고구마는 흔해서 특별할 게 없지만,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도 오늘 내가 맡은 이곳의 흙내음을 보내주고 싶다. 




목욕가방을 챙겨서 산방 온천으로 향했다.

모슬포에 들러 겨울이 제철인 방어를 사 먹고 노천 온천을 즐기다 마사지를 받고 - 돈은 이럴 때 쓰라고 모으는 거지 란 생각이 번뜩 드는 마사지였다. 안내문에 쓰여있는 대로 탄산 온천과 온수탕을 들락날락하고 나와보니 밤이 되었다. 온천 앞에 작은 포장마차가 보여서 종종거리고 달려가 따뜻한 정종 도쿠리와 어묵을 한 개씩 먹으니 몸이 속까지 녹는다. 인심 좋게 서비스로 주시는 귤을 까먹으면서 아까 줄지어 먹던 중국집이 궁금해서 다시 모슬포로 향했다. 

홍성방에 가서 해물 짬뽕을 시켰는데 기대보다 맛있어서 셋이 손으로 게를 뜯으며 정신없이 먹었다. 목욕 후에 먹는 음식은 다 맛있는 건지. 집에 돌아와 난로를 켜고 귤을 까먹으면서 추위를 호호 불며 잠이 들어야 마땅한 푸짐하고 호사스러운 하루다.


12,4

여기 와서 알게 된 시인분이 남편에게 귤은 좀 얻어먹고 다니냐고 여쭈어서 근처 농장에서 사 먹는다고 답했더니 우리 없는 사이에 문 앞에 귤 박스를 놓고 가셨다. 다른 동네 분도 귤을 좀 가져가라셔서 차를 끌고 갔더니 컨테이너 두 박스 분량의 귤을 담아주셔서 갑자기 귤 부자가 되었다. 

겨울이 되었으니 서울의 친지, 친구들에게 귤을 보내 주려고 했는데 우리가 직접 농사를 하는 게 아니니 돈 주고 사는 수밖에. 여러 박스를 보내야 해서 배송비 때문에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강정마을 온라인몰에서 주문해서 우리는 귤을 보지도 못했다. 받아본 사람들이 다들 맛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길래 우리도 거기서 주문해볼까 하던 참에 귤 부자가 되고 보니 제주에서 귤은 사 먹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워낙 비상품 귤이 많다 보니 이맘때 식당에 가면 손님들이 집어가도록 바구니에 귤이 한가득이다. 그런데 비상품이라고 맛이 없는 건 아니라서 여러 동네의 여러 모양과 크기의 귤들을 먹어보고 있다. 

요즘 이렇게 얻어만 먹다가 대머리가 되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12,6

두 가마니나 따온 브로콜리 잎사귀를 건조 중이라서 집안이 풀냄새로 꽉 찼다. 

브로콜리를 기둥까지 먹는 건 알았는데, 잎사귀도 먹는 줄은 이제 알았다. 밭에 나가 보면 무성한 잎사귀에 둘러 쌓인 중간에 브로콜리만 도려내고 버리기가 아깝긴 했다. 

지난번 동네 어른이 주신 브로콜리의 잎사귀를 삶고 말려서 나물처럼 무쳐 먹었더니 씹는 맛이 있고 향도 좋았다. 그래서 어제 양할머니와 브로콜리 수확이 끝난 밭에 나가 잎사귀 중에 여린 잎만 두 가마니나 따온 것이다. 

나름의 시골 살이라 그런지 어쩌다 보니 저장음식을 만들고 있다. 

장을 자주 봐서 서울에선 쓸모없던 식품건조기로 처음으로 감말랭이, 고구마 말랭이를 해 먹다가 오늘은 풀가동으로 브로콜리 잎사귀를 말리고 있다. 건조기로는 모자라 방마다 미역처럼 널어놔서 수풀에 와있는 냄새가 난다. 먹기 전부터 몸이 좋아지는 것만 같다. 

날이 계속 흐리고 차서 집에만 있게 되는데 겨울 동안 사부작사부작 이런 것들을 하고 지내는구나. 

엄마는 텃밭에서 키운 손바닥만 한 무로 동치미와 깍두기를 담갔다. 씨를 받아다 심고 물만 주고 키운 거라 모양이 들쑥날쑥 고추만 한 것부터 애호박만 한 것까지 다양하게 작은 게 과연 무 맛이 나려나 했는데 웬걸, 서울에서 해 먹던 김치보다 더 맛있다. 시골살이에 김치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게 잘 먹고 있다. 엄마의 동치미가 달지 않고 깔끔해서 특히 맛있는데 비법이랄 것도 없이 소금을 잘 맞추는 게 엄마만의 손맛이다. 그래서 이번엔 엄마의 손맛을 배우려고 딸과 사위와 옹기종기 앉아서 엄마가 순서를 일러주며 담갔다. 외할머니께 배운 동치미 비법이 삼대에 걸쳐 전해지는 순간이었다. 이곳에 동치미 국숫집을 열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텃밭 농사 중에는 고수 농사가 제일 잘됐다. 


 

우연히 제주 분들 탐방 모임에 끼어서 동굴 탐방에 다녀왔다.

동굴 탐방이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고 우리 동네 근처에 있는 동굴 두 군데를 여럿이 함께 걸었다. 

특이한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관광지가 아니라 마을 안 인가와 접해 있는 동굴이 꽤나 컸다. 설명을 듣기로 제주분들은 어릴 때부터 마을 안의 동굴을 비밀 아지트로 여기고 들락거리며 놀았다니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신났을까 싶다.  

비밀의 공간답게 감춰진 수풀 사이로 좁은 입구를 따라 내려가니 고래배 속 같은 지하 공간이 나타났다.  바위틈에서 잠들어 있는 박쥐를 보니 과연 동굴이었다. 우리가 처음 간 한들굴은 1.5km에 달하는 굴로 구간 구간 넓이가 좁아졌다 넓었다 해서 허리를 숙여 걷다가 바닥에 바짝 엎드려 기어가야 했다. 온통 흙투성이가 되었지만 작은 불빛 조차 없는 축축한 어둠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처음엔 한눈에 동굴을 보고 싶은 욕심에 렌턴을 훤히 비추며 걸었는데, 문뜩 랜턴을 끄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니 눈이 아니라 몸으로 어둠이 다가왔다. 이윽고 가지고 있던 랜턴을 모두 끄고 사람들과 함께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암전의 시공간에서 우리 둘은 서로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칠흑 속에서 따스함은 온전히 마음으로 전해졌다.


12,16

첫눈 소식에 은근 설레었는데 어시무시한 우박이 쏟아졌다. 

마침 바닷가 앞 작은 식당에서 나오던 참이라 머리가 흔들릴 정도의 강한 바람과 싸라기 눈에 매섭게 맞았다.  

중산간 지역에는 짧은 시간에 눈이 많이 와서 소복이 쌓였던데 여기는 바람과 우박만 내린다. 

강아지들이 킁킁대며 몸을 떨어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담요로 몸을 감아주고 나도 파카를 껴입고 난로 앞에 앉았다. 

제주의 겨울을 나보고 나서야 ‘스산한 겨울’이 피부에 각인되었다. 종종 제주에 사는 젊은이들이 겨울에만 동남아에 가서 몇 달을 보내고 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처음엔 그 자유로운 열정에 놀라는 정도였으나 겨울을 나고 나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제주 겨울의 스산함과 높은 난방비와 물가와 바람 소리를 타고 오는 불안함. 몇 달만 따뜻한 나라에서 보내는 것도 현명한 노릇이었다. 


12,22

매년 11월부터 12월까지 거실에 작은 트리를 놓고 알조명을 켜놨었는데 여기까지 트리는 가지고 오지 못해서 왠지 섭섭한 연말이었다. 슬슬 캐럴을 틀어 놓으니 남편이 인터넷으로 저렴한 트리를 사자는데 조악한 트리 사진을 보니 내키지 않아서 말았다. 

캐롤 말고는 전혀 연말 기분이 느껴지지 않는 시골이라 아쉽던 차에 길가에 흔한 빨간 열매를 보고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제주에는 겨울에도 사철나무가 많아서 초록색 잎이 흔하니 엄마가 마당에서 주어 온 나무줄기를 엮어서 형태를 잡고 산책길에 주운 솔방울과 열매를 달았더니 제법 모양이 난다. 아침에 우편으로 온 연말 카드 포장지에서 리본을 재활용해 리스에 감고 현관 입구에 놓았더니 집 전체의 분위기가 달라진 듯하다.

뻔할지라도 크리스마스에는 이렇게 초록과 빨강이 그리워진다. 이렇게 만들어 보기는 처음인데 가족이 함께 만들어서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조금씩 말라가는 리스를 보면서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해의 행운을 빌어야지.  


2015년의 마지막 날

안녕 잘 가요. 고마웠어요. 


2016년 1월 1일 

새해 이벤트로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바지런히 첫날의 해를 보려고 송악산으로 향했다. 

성산일출봉, 한라산 등에서 해돋이 행사들이 거창한데 우리는 조용하고 나직하게 보내고 싶어 가까운 송악산으로 향했지만, 벌써부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송악산 전망대로 향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앞사람의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바다를 보니 해를 보기는 글렀다 싶게 구름이 내려앉았지만 그 너머의 해라도 보고 싶어 모자에 얼굴을 묻고 바닷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다. 생각대로 예정 시간이 되었는데도 날만 밝아오고 해는 보이지 않아 맨 하늘에 대고 각자의 소원을 빌고 내려왔다. 

새해 행사로 딱인 목욕을 하러 온천으로 향하는데 동그란 해가 뒤늦게 구름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게라도 봤으니까 그만이다. 


긴긴 겨울밤

영화관에 가기 힘든 대신 고전 영화들을 찾아보고 있다. 며칠 전엔 데어윌비 블러드를 보고 감독의 영화를 찾아서 펀치 트렁크 러브를 보고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루 동안 의식의 흐름대로 그린 간단한 드로잉을 집에 있는 프린터기로 뽑아서 스템플러로 찍어 열 권의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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