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제주 생활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차연 Mar 29. 2017

11 강아지들


1,20

똘이는 남편이 14년을, 뽀루는 내가 15년을 키우다 결혼을 하면서 함께 살게 되었다. 똘이는 남편만 좋아해서 지금도 나한테는 친절하지 않지만 어째서인지 잘 때면 꼭 내 옆에 붙어서 뽀루는 몸을 동글게, 똘이는 팔다리를 펴고 옆으로 잔다. 그래서 결혼 이후로 나는 팔다리를 쫙 뻗고 자본 적이 드물다.

나는 사실 개 알레르기가 심해서 지금도 매일 알레르기약을 복용하며 지낸다.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고, 매년 겨울 내내 기침을 달고 살면서도 알레르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은 못하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쉽게 발진이 나는 피부도, 알레르기성 결막염을 눈에 달고 사는 것도, 한번 시작하면 봄이 되어야 멎는 기침도 뽀루 때문이었다니. 원인을 알고 나니 모든 게 이해가 되는데 몸의 주인이 둔하고 미련했다.

이후부터 개들과 내 구역을 나누고 침대에는 못 올라오게도 해봤지만 한 달쯤 해보다가 우리가 먼저 포기하고 말았다. 십 년을 넘게 살을 붙이고 살던 녀석들은 갑자기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같은 공간에 사는 이상 일정 거리를 둔다고 해서 증상이 좋아지지는 않으니까 차라리 내가 약을 꾸준히 복용하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

제주에 오면서 미리 일 년치의 약을 타 와서 강아지들과 살을 붙이며 살고 있다. 두 녀석이 항상 우리만 쫓아다니면서 곁을 떠나질 않으니 두 녀석의 나이만큼 책임감이 무거워진다.

넓은 마당에서 뛰어놀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기에는 녀석들은 너무 나이가 들었나 보다. 뽀루는 제주에 와서 녹내장 판정을 받았다. 노령견인 시츄에게는 흔한 일이래서 담담히 받아들이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도 꾸준히 녹내장 안약을 넣어 줬더니 흐릿했던 눈이 다시 맑아지고 안압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조그만 녀석이 장하다.

단추같이 까만 코로 아저씨처럼 드렁드렁 코를 골며 잠든 녀석의 복슬복슬한 털을 꼭 끌어안으면 작고 통통한 몸이 품 안에 폭 들어온다. 가슴으로 파고드는 작은 따스함이 찬 몸과 딱딱했던 마음을 녹여주어 내가 두 녀석에게 많은 것들을 주기보다는 더 큰 것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일어날 동안 꼼짝 않고 같이 자는 체를 하면서 허한 속까지 덥혀주는 겨울 난로 같은 녀석들이다.

10, 5

밤사이 태풍이 제주를 관통해 지나갔다.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더니 새벽 4시쯤 정전이 되고 집전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이면 물러날 거란 예보를 들어서 어떻게든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다른 차원의 바람 소리에 덜컥 원초적인 겁이 나서 우리 식구 모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영화 A.I를 보면 각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비 박사가 만든 감정이 있는 ‘아이 로봇’에게 한번 ‘부모’를 각인시키면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 불치병에 걸린 친아들 마틴을 냉동 상태로 둔 헨리와 모니카 부부는 ‘아이 로봇’을 데리고 왔지만 한번 작동되면 돌이킬 수 없는 각인 프로그램 때문에 고민 끝에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예전의 아이가 있는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깨어난 친아들이 돌아오고, 필요가 없어져 버려졌음에도 엄마의 사랑만을 갈구하던 아이 로봇은 영화 끝에서야 단 하루 되살려진 모니카와 시간을 보낸다. 비록 ‘진짜 아이’가 되지는 못했지만 ’ 사랑한다 데이빗, 언제나 널 사랑했어’라고 말하는 모니카의 품에서 엄마의 사랑을 확인하고 잠이 들며 영화는 끝난다.

몇 번을 본 영화지만 최근에 텔레비전을 돌리다 다시 보면서 문뜩 우리 곁의 강아지들에게는 우리가 ‘각인’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똘이가 입원한 병원에 전화를 해보니 밥도 먹고 신부전 수치도 조금 낮아졌대서 다행이다.

무엇보다 잘 때 곁에 발 냄새 폴폴 나는 둥글고 복슬한 녀석이 집에 없어서 기분이 이상하다. 작은 녀석의 크기가 이렇게나 크다니. 상대적으로 뽀루는 상태가 좋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는 없는 정도여서 가까운 한림 동물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하고 있다.

15,14살의 나이에 비해 건강하고 무탈해서 방심했는데 한 순간 몰아친 태풍같이 두 녀석의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두 녀석을 만나고 요즘 같은 때가 없었지만 밤사이 태풍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맑게 개인 오늘처럼 건강을 되찾기를, 이제까지 처럼 우리의 일상을 녀석들과 함께 하기를. 좀 더 녀석들에게 좋은 시간을 남겨줄 수 있기를-.   

많이 욕심내지 않고 내년까지 꼭꼭 채워서 건강하게 우리 곁에서 살아주길 하는 마음뿐이다.





10,18

똘이를 보내주고 어찌해볼 도리가 없음 앞에서 먹먹한 체로 주춤주춤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상상을 넘어서는 온몸으로 겪어내야 하는 경험이므로 겪어보지 않고는 공감하기가 힘든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마음이 아프고 상처받기 쉬워서 똘이에 대한 말을 아끼고 있다.


언제쯤이나 지나면 괜찮아질까.

그래도 우리 둘이어서 다행이다. 한쪽이 울면 다독여줄 다른 쪽이 있어 다행이다. 그리고 아직 우리가 보살펴줘야 할 뽀루가 있어서 기운을 차려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10 제주 겨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