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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늠 May 06. 2023

23년 만의 방콕

2023년 4월 말 태국 방콕을 다녀온 후

세기말이 지나고 2000년이 되던 해 8월 15일 나와 남편은 부부가 되었다. 식장에 도착한 하객들이 땀을 흘리며 왜 이리 더운 날 결혼하냐며 한 마디씩 말했다. 광복절 결혼식은 전적으로 내 생각이었다. 여름은 예식장 비성수기여서 음식값만 지불하면 되고, 그 외 비용이 모두 무료였다. 친정에서 해방되는 의미 있는 날이라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아버지의 일이 한가한 계절이기도 하여 별다른 이의 없이 그대로 진행이 되었다. 신혼여행지는 그때 보았던 여행 패키지 중에서 가장 저렴한 곳을 선택했고 그곳이 태국이었다.


 태국 신혼여행에서 기억에 남는 일은 거의 없다. 가이드 일을 쉬다 다시 시작했다는 현지 거주 한국인 가이드가 우리 부부의 전 일정을 따라다녀 다소 부담스러우면서도, 사진 찍기에 편했던 여행이라는 점을 빼면.


 23년 만에 방콕을 다시 찾았다. 20대였던 우리 부부가 사진을 찍었던 장소를 다시 찾아볼까 싶었다. 하지만 사진 찍은 장소를 알만한 단서가 없었다. 사진을 보니 우리는 사원을 구경했고, 코끼리를 탔으며, 세계의 유명 유적지를 미니어처로 만들어놓은 공원을 방문했다. 열과 성을 다해 과거의 여행지를 되짚어 보고 싶을 만큼 강렬한 추억이 없어, 방콕은 나에게 처음 가보는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태국까지의 비행시간이 5시간이 넘었다. 동남아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꽤 멀었다. 뉴스에서 연일 방콕의 이상기온을 말하고 있어, 얼마간 각오를 하고 갔던 터였다. 하지만 머무는 동안 간간이 비가 내려 열기를 식혀서인지 혹독하리만큼 덥지 않았다. 건조한 더위여서 햇볕 아래에서 걷지 않고 그늘에 머물면 꽤 쾌적했다.


 우리는 호텔 주변을 산책하고, 주변 음식점과 마사지 숍을 이용했으며 지하철로 이동할 수 있는 현지 시장과 쇼핑몰을 구경했다. 그게 다였다. 계획도 하루에 한 가지만.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마음이었다. 공원에 앉아 공원 조경과 도시 전경을 바라보며, 느긋함을 즐겼다. 일상의 의무에서 벗어난 시간만으로도 나에겐 온전한 휴식이었다. 참 행복했다. 내가 이런 여유로운 여행을 즐긴다는 게 신기했다.


 20대 중반의 나는 경제관념이 없는 나름 천진한 시골뜨기였다. 나와 남편은 신혼여행지에서 결혼 후 어떻게 살지 언약했다. 언약은 말 그대로 말로 하는 약속이다. 당시 내가 꿈꿨던 결혼 생활은 매년 해외여행을 다니는 것이었다. 남편은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했다. 그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허튼소리로 나를 현혹할 만큼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역시 모든 걸 다 따져보고 대답할 만큼 알 거 다 아는 사회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둘 다 참 어렸다. 그때 우린 마이너스 인생이었고, 난 빌린 돈을 깔고 앉은 채 현재를 즐길 만큼 통 큰 스타일의 여자가 아니었다.


 집을 사고, 아이를 낳고, 집을 늘리고, 차를 바꾸고……. 인생에는 여행 말고도 큰돈 들어가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매년 해외여행을 하자고, 말로 약속했던 우리는 매일 TV로 여행을 다녔다. 그러다 남편의 업무차 부부동반으로 태국에 갈 일이 생겼다. 일정을 준비하면서 생각했다. 인생이 정말 한순간이구나. 참 뻔하고 더딘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라고.


 결혼 후 출발선이 달라지는 친구들의 모습을 많이 보았다.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게 싫고, 스스로 옹졸해지는 게 좀스러워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제 내 결혼식 하객으로 참석했던 친구들 중 연락이 닿는 친구는 몇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평생지기가 생겼다. 23년 전 함께 방콕에 갔던 그와 난 다행히 님에서 남으로 모음이 바뀌는 사이가 되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이제 말없이 마주 앉아 음식을 먹고, 상대방보다 주변 풍경을 둘러보는 데 더 몰두하며, 손을 잡고 걷다 덥다고 손을 놔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사이가 되었다. 뙤약볕을 조금 걸었다고 셔츠에 온통 땀이 배인 남편을 보고 웃으며 인상을 찡그리면 그는 옷을 펄럭이며 마주 웃는다. 이번 방콕에서 우린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약속한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몇 번의 굴곡이 있었지만 지금 나는 그런대로 순조롭고 고요한 일상을 살고 있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지금부터 23년 후, 2046년.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때도 몇 번의 굴곡은 있었으나 지금 이 순간은 평안하다고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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