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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Jun 15. 2022

오만한 생일을 보내겠습니다.

죄와 벌, 그리고 사랑

어느 새벽에 <죄와 벌>을 다시 읽다가 창문 밖으로 번개가 치는 걸 봤다. 처음에는 헛것을 본 줄 알고 혼자 무서워했는데 곧 천둥소리가 들리자마자 내가 목격한 섬광이 번개였다는 걸 알았다. 정말 얼마 있지 않아 비가 쏟아져 내렸고 나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느긋하게 일어나 창문을 닫았다.
<죄와 벌>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나도 라스콜리니코프와 함께 미쳐버릴 것 같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세세한 묘사와 생각의 나열은 인간을 책 속의 인물로 만든다.
나는 <죄와 벌>을 아주 좋아하지만, 그럼에도 <죄와 벌>에 전반적으로 깔려있는 분위기는 무서워한다. <죄와 벌>은 이호철 <나상> 오상원 <유예>와 공기가 유사한 느낌이다. 물론 <나상>보다는 <유예>와 공기의 결이 더 비슷하고 유예보다 좀 더 진득하고 표독스러운 먹구름이 <죄와 벌>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나는 그 표독스러운 먹구름을 무서워한다. 읽는 내내 진득한 먹구름과 번개가 내 뇌를 가득히 채우는 것 같고 뇌리에는 이미 생각이 번져 검게 흐릿하다. 나는 이 진득한 것들을 수능 공부할 때부터, 어쩌면 그 이전부터 무서워했다. 존재와 연관된 사유와 그 사유가 검은 도화지에서 진행된다는 사실은 문장을 읽는 나를 동화시킨다. 똑같이 나도 검게 변한다. 나는 그게 조금 무서운 것 같다.
읽다 보면 가끔 소름이 돋아서 피부에 오돌토톨한 것들이 올라오고 홀로 놀라서 심장을 부여잡게 된다. 별 것 아닌 일에도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반응을 크게 하고 편집이 생길 정도로 똑같이 생각을 하게 된다. 꼭 공포영화를 본 것처럼. 덕분에 나는 <죄와 벌>을 나 혼자만 있을 때, 그리고 집 밖에 나가지 않는 날에만 읽는다. 


글을 쓰는 지금, 노파를 도끼로 내려친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목이 계속 타오른다. 덕분인지 오랜만에 고소한 닭껍질 튀김이 먹고 싶어졌다. 가능한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또 밥보다는 면, 파스타를 먹을 거라면 국물 없이 꾸덕한 일본식 파스타가 먹고 싶다. 이쯤 되면 목이 마르다는 핑계로 먹고 싶은 음식을 그냥 나열하는 것이다.

곧 생일이 다가온다. 의미 없는 나의 생일이. 세상에 축복받을 수 없는 탄생은 어떤 사연을 가졌기에 일어나는 일일까? 그런 나의 고귀한 탄생일은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부여하는 신의 사자가 되었다.
내 생일은 17년을 같이 살았던 외할머니의 기일이다. 맞벌이 부모님과는 거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초중고 시절에 나는 이모와 할머니를 엄마처럼 따랐다. 그리고 할머니는 고등학교 일 학년 내 생일날 돌아가셨다.
어떤 축복은 완전한 축복이 아니다. 그러니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의 마음의 빛깔은 제법 파티의 분위기와 알맞은 색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사람들을 들여다보자. 조금만 더 자세히, 하얀색 크림을 닮은 사람들의 마음 겉 부분을 걷어내면 그들의 알맹이에는 의구심과 일말의 죄책감이 도사리고 있다. 어떤 마음에는 암울한 동굴이 마음속에 텅 뚫려있기도 하고 어떤 마음은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탄생의 의미를 헤집어 놓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들 마음의 겉껍질이 하얀색인 이유는 단지 생일 주인공 때문이다. 고작 그 사람 하나 때문에 내 곁의 가족들은 웃고 박수를 치며 발악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발악이 내 생일날의 요약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정말 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가장 축하받아야 할 날이 모두가 가면을 쓴 채로 쓰라린 죄책감을 상기하고 있는 축제 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신이 내린 벌일지도 모른다. 또 벌인 것이다. 나는 몇 번째 벌을 받으며 살아가는 걸까? 이 알 수 없는 죄의식은 태초에 생과 사가 결정된 지옥의 명부에 적혀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벌을 받을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덕분에 나는 나의 생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죽음은 고통이 아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었으므로 나의 생일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애초에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생일날 먹는 케이크는 내게 디저트일 뿐이다. 따라서 생일 케이크라는 말은 어딘가 모르게 어감이 어색하다. 생일이라는 저주받은 날과 달달한 케이크가 같이 붙어있다니 이건 비참한 축제를 모르는 누군가의 말장난인 것만 같다.
사람은 태어나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죽는다. 그러니 이 기묘한 생일날도 어찌 보면 분위기를 망치지 않으려는 내 주위 사람들의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애석하게도 내 사람들의 마음속을 콕콕 찔러 속내를 들추려 하고 있다.


할머니는 마지막 순간 우리 엄마 곁에서 돌아가셨다. 사랑 속에서 운명하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지금보다 조금 더 전의 나는 ‘사랑’하면 연인들 간의 사랑부터 떠올리는 어린아이였다. 덕분에 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닌, 연인으로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의 의미를 찾아 마구 헤맸다.
다음은 그 당시 나의 일기 중 일부이다. ‘난 이따금 사랑의 정의를 찾아 헤맸으나 끝내 성과는 없었다. 나는 사랑을 같잖은 것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일말의 변화조차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나를 나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나는 또 사랑에 대해 한바탕 구르고 난리를 피워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다.’
그렇게 나는 사랑의 의미를 찾으려 여러 번 방황했고, 그때마다 생일날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어떤 인간은 누군가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나는 나 스스로를 싫어한답시고 채찍질을 했지만 차마 나를 방치할 수는 없었고, 그렇다고 언니 같던 할머니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나는, 할머니가 눈을 감으신 그 순간에도, 할머니의 숨이 멎는 순간에도 사랑이 있었음을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묘사하는 말도, 어떤 감정을 묘사하는 말도 누군가에게는 낯부끄러운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들은 나의 말들이고 살아있는 순간의 말이다.
아마도 나는 언젠가 또 사랑을 할 것이다. 물론 지금도 여러 방면의 사랑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사랑의 의미를 찾아 방황했으면서도 최근 기나긴 첫사랑이 끝났다는 사실 때문에 마구 일기를 휘갈겼다. 당시 머리끝까지 화가 났던 나는 ‘사랑이 아주 같잖은 것’이라며 결론지었었다. 그러니까 고작 ‘사랑’은 삶의 무게에 비하면 지나치게 같잖다는 논리였다. 정말이지 그때는 내 몸이 녹물을 흘려내는 공장인 줄로만 알았다. 사랑은 항상 사람을 죽이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떤 사랑은 여전히 사람을 살린다. 내가 아주 사랑하는 선생님과, 별을 닮은 친구와 지인들이 날 열심히 일으켜주었다.
그 덕분일까, 언젠가 발송 취소한 메일에 이런 내용을 적은 적이 있다.

열아홉의 겨울날 저는 누군가를 만났고 그 사람의 언행에서 제법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그때부터 조금씩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두 번째 구원이었어요.
사람들은 자꾸 저를 살리려 들고 그럴 때마다 저는 나를 살린 사람들에게 다시 숨을 주고 싶어요.
그렇다면 이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운명에 얽히고 만 걸까요.

여전히 나를 거쳐간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나는 그들의 삶에 잠시 머물렀으며 어떤 사람은 나의 마음을 심하게 짓눌러 멍이 생기게 하기도 했다. 잘 듣지 않는 칼로 지저분하게 그은 상처들. 한 번에 달라붙지 않는 흉터들. 지나치게 연장된 살갗. 성인이 되고 나서는 술을 마시면 흉터가 짙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날 열등에서 꺼내 주었고 어떤 사람은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정작 그 사람은 내가 가장 신경 써야 할 시선이 되고 말았다.
유일하게 내가 신경 쓰던 시선이었다.


힘들 때면 가장 싫어하는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한다. 학교는 싫었지만 선생님들을 사랑했기에 내게는 추억 속에 사람이 가득하다. 감사한 일이다. 짧지만 많은 시간이 흘렀고 여전히 내 기억은 모질게 그은 상처처럼 지저분하지만 그 속에는 감사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매일 밤마다 눈물을 멈추지 못할 지경이다.
아마도 나는 사람에게 자꾸만 구원받는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꾸만 나를 살리려 드는 것 같다. 그러면 나도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 외에는 생의 목적을 찾을 수 없다. 나도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그게 유일한 존재 이유인 것만 같다.
좋은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그건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인형은 내 삶에 거한다. 그리고 나는 나를 살리는 사람들과 이야기에 감사한다. 정말이지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일생 동안 사랑으로 가득 찬 동화를 편찬하는 일인 것만 같다.

매일이 동화일 수는 없을 것이다. 또 매일 좋은 사람 곁에서만 지낼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손에는 여전히 동화 원고와 펜이 들려있고, 나는 내 삶에 거하는 작가이자 편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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