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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한 뇨뇨 Sep 29. 2021

고통의 파편

며칠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1명 별세하고 생존자는 이제 13명이 남았다는 기사를 봤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산 이었던  세대들이 점점 사라져 간다는 것에 슬픔이 밀려든다. 나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 끝이 나지 않는 진짜 지옥에 살면서도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일으키고 가족을 지키고, 자식들을 먹이고 키웠던 그들.

한 명 한 명 세상을 떠날 때마다 누군가의 기억, 그리고 누군가의 책임감에서 그들은 사라지는 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가 일했던 병원은 국가 유공자, 보훈 환자들이 유독 많았다. 그들은 입원을 할 때면  자신의 자랑인 보훈 모자를 쓰고 , 옷에 훈장을 달고 왔다. 훈장에 따라 그들만의 '급'이라는 것이 알게 모르게 정해져 있었다.


그들은 한 달을 입원하고 퇴원하면 며칠 집에서 지내다 을 반복했다.  다행히 입원비가 나라에서 지원되기도 했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병원에서 해결할 수 있어 그들에겐 병원이 제2의 집과 다름없었다.  


대부분 80~90세 이상으로  일제강점기, 한국 전쟁, 나라의 온갖 비바람을  겪으면서 몸은 물론 정신의 충격도 남아있었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했다.  그런 아버지 밑의 자식들 부모를 부양할 만큼 넉넉하지도 못했기에 병원에서 부부가  여생을 마무리하곤 했다.


일제 강점기, 6.25 한국 전쟁, 베트남 참전까지 그들이 입원한 병실은  참혹했던 역사 속 이야기가 자주 흘러나왔다. 어떤 할아버지는 6.25 참전 당시 눈에 파편을 맞고  실명했고, 어떤 이는 지뢰를 밟고 다리 한쪽을 잃었다고 했다. 대부분 눈에 보이는 상처는 아니더라도 X-ray 나 MRI 찍어보면 작은 파편들은 하나씩 보이지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그중 용수 할아버지는 병실에 들어서면

"오하요우。。(중략)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일본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 당시 90세를 바라보고 있던 할아버지 일본 교사에게 배운 일본어가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50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지만 한국 전쟁의 상처가 할아버지에겐 현재 진행형이었다.


밤 근무 때 병실 순회를 가면 할아버지는 가끔씩 악몽에 시달렸다.

식은땀을 흘리고 허공에 손짓하며

" 저리 가 , 어어어어어 "

하며 무엇인가에 쫓기듯 소리 지르고 잠에서 깨어나면 그제야 살았다는 듯 두리번거리며 식은땀을 닦았다.


다른 환자들의 말에 의하면 용수 할아버지는 북한군을 수십 명이나 죽이고 전쟁에공을   훈장도 받았다고 했다. 인간이 살면서 평생 지 않아도 될 ,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사회의 격동기 견뎌야 했던 불운의 세대였다.

경험해 보지 못한 고통이 나에겐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는 내가 신규 간호사였을 때도 , 아니 그 이전에도 병원에 계속 입원했다고 했다.


"전쟁에 공을 세우고, 훈장도 받고, 나라에서  월급처럼 돈도 꼬박꼬박 들어옵니다"


 옆에 환자들에게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다행히 보훈 환자에 대한 처우가 얼마 전부터 좋아졌는지 당시 내 월급보다 많이 받는다고 하셨다. 가끔씩 나라에서 주는 월급날이라 하며 간식을 사주기도 했다. 뒤늦게라도 나라에서 그분들에 대해 예우를 해 드리는 건 다행이었다.


몇 년 동지켜본 그는 참혹한  시대를 견만큼  정신 또한 강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은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내가 10년 차 정도 되었을 때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횟수가 점점 늘기 시작했다. 밤에 소리 지르는 것은 기본이었고 얼마 후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인지도 몰랐다. 결국 치매를 진단받았고 혼자서는 병원 생활하기 힘들 정도로 정신줄을 놓았다.


꿈에서 쫓기던 할아버지를 깨우자 돌변한 하루가 있었다.

“ 이 망할 것들아. 내가 전쟁터  차가운 흙바닥에서 밤을 지세고,  사람을 죽이고 , 나라를 위해 희생한 걸 너희가 알아?”

한 순간 할아버지는 폭력적으로 변했고, 눈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섬뜩한 차가움이 보였다.

간호사 세 명이 말려도 이길 수 없을 정도로 용수 할아버지는 전쟁터의 한 군인처럼 보였고,

말리던  나와 후배 간호사는 할아버지의 지팡이에 맞고 결국은 보호자가 새벽먼 곳에서 달려왔다.

 

예전엔 간호사들에게 유독 신사 같던  할아버지였다. 치매로 정신을 놓는 순간  어린 시절 일본인 선생에게 배웠던 일본어가 튀어나왔고, 전쟁터 차가운 땅에서 총을 겨누던 한국 전쟁의 순간으로 그는 돌아가 있었다.

기억이 없어지고 점점 죽음이라는 종착역이 다가 오지만 그들에겐 지워지지 않는 파편이 정신과 몸에 존재했다. 다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무의식 속에도 여전히 고통이 존재했었다. 나는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 가늠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에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불쑥 그때의 기억이 튀어나와 꿈속에서도 자신을 괴롭히고, 매일 자신을 따라다닐 만큼 여전히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다들 살기 어렵다, 헬조선이다 외치지만 그분들의 삶에 비하면 나는 많은 혜택을 받았고, 또 안전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이 든다. 나의 조부모 세대들과 부모님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인간답고, 편안한 생활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10여 년이 지났지만 할아버지의 그날 외침은 여전히 내 기억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 이 망할 것들아. 내가 전쟁터  차가운 흙바닥에서 밤을 지세고,  사람을 죽이고 , 나라를 위해 희생한 걸 너희가 알아?”


 점점 그들의 희생과 고통이 희석되고 , 잊혀가는 요즘, 짧은 글로 분들의 삶을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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