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O 한 이야기
소성리야간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저녁밥을 일찌감치 먹고는 저 아랫동네 사는 상돌엄니와 경임엄니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이 아니면 소성리마을회관 앞 난로가로 올라오신다. 예전엔 옥술엄니까지 세자매였지만, 이제 두 사람이다. 난로가에 지키는 사람 없을까 걱정되서 올라오고, 저녁먹고 운동삼아 올라오고, 매주 수요일은 노래연습하러 올라오고, 매주토요일은 촛불문화제 때문에 올라온다. 그리고 일요일은 김천촛불 갈려고 올라온다.
소성리야간시위에 금연엄니는 늘 주연이시다. 할배는 오전나절 마을 지키고 앉으셨고, 할배가 집으로 돌아가시면 저녁밥 차려놓고 할매가 나오신다. 백광순엄니는 된장공장에 다녀와서 저녁밥먹고 나면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집에 있어도 될거 같은데, 괜히 난로가가 궁금해진다. 오늘은 누가 왔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아무도 없을까봐 걱정도 돼서 나오신다. 소성리주민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기도 했지만 야간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멈춘 건, 나의 글쓰기, 소성리로 찾아오던 사람들의 발걸음이다.
마지막으로 소성리야간시위를 쓴 날은 12월 6일이었다. 두달동안 나는 글쓰기를 멈췄다. 그 날이후로 내 노트북을 열지 않았다. 노트북을 한 달이상 열지 않았을 때 살짝 걱정을 했다. 노트북이 고장나는 건 아닌지, 걱정을 하면서도 문을 열기 위해 손가락을 까딱하지 않은 채, 책읽기에 푹 빠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트북을 열었다가 노트북이 켜지기 위해서 업데이트를 하면서 정신을 수습하는 동안 몇시간을 기다려야했다.
그 시간동안 한자도 쓸 수 없었다. 한자도 나아가지 않았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고, 내 머릿속은 텅텅 비어있는 듯 아무생각을 하지 않았다.
옥술엄니의 암투병이 시작되었을 때였다. 서울의 병원을 예약해놓고 내게 전화를 걸어온 옥술엄니는 깻잎을 가져가라고 불렀다. 소성리로 올라가는 길에 들른 옥술엄니께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하고 있을 때 오히려 옥술엄니가 나를 위로해주셨다. “괜찮을거야. 걱정하지말어” 그리고 소금절인 깻잎봉다리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리고 한참동안 보지 못했다.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는다는 소식만 들었다. 병원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집에 오셨다가 병원으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오기를 반복하면서 치료를 받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상돌엄니께 옥술엄니집에 나를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갈 수는 없을거 같아 이웃가까이 사는 두 엄니들 따라 문병을 가고 싶었다. 늦은밤이었다. 그날도 엄청 추운날이었다. 옥술엄니집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창문을 두드리면서 불렀지만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그러다가 안에서 문이 열리고, 옥술엄니가 까까머리로 살이 쏙 빠져서 조막만한 얼굴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항암치료로 힘들었던지 틀니를 할 수 없어서 입은 합죽해졌다. 음식은 마시는 걸로. 처음에 죽을 뻔 했는데, 이제 좀 살 거 같다고 하셨다. 우리를 보고는 반가워서 수다스러웠다. 그렇게 수다스런 모습 처음 봤다. 늘 다소곳이 얌전하게 앉아있었던 옥술엄니는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집안에 있으면서 수요일 낮에는 사드반대집회하겠네, 토요일 밤이면 사드반대 촛불문화제 하겠네, 그 시간을 다 기억하고 계셨다. 매일 밤 소성리야간시위하는 기억을 잊지않으셨다. 아프지만 많이 그리워서 가고싶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또 한참을 못 뵈었다.
영화 <소성리>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임순분부녀회장님과 도금연엄니가 주연배우로 등극했다. 베니스국제영화제까지 진출해보자는 야심만만한 꿈을 꾸면서 가방모찌는 내가 하겠다고 염치없이 나섰다. 영화 <소성리> 공동체상영하는 자리에 주연배우 가시는 길에 가방모찌부터 하라는 압력이 가시화되었다.
대구 시국촛불 1주년 기념행사를 대백앞에서 할 때 소성리 엄니들의 노래패 ‘민들레합창단’을 초대해주셨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대구백화점앞에서 공연을 하게 되니 몇날 며칠동안 소성리엄니들은 노래연습을 했다. 대구로 나가는 날 차량은 맞춰져있었고, 나는 평화장터 점방을 열기위해 소성리에 남으려했지만, 부녀회장님은 “할매들이 소희씨한테 의지해서 무대에 올라가는데 소희씨 안가면 어떡해? 같이 가야지” 하면서 나를 끌어내셨다. 그날 평화장터 점방문 여는 걸 포기하고 엄니들과 대구로 향했다. 여러명의 엄니들과 도심의 한복판을 오며가며 복잡한 길이 만만하지 않았다. 그날 엄니들을 내가 모시고 어디든 다녀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영화 <소성리> 공동체 상영에 참석할 때 내가 기꺼이 가방모찌가 되어드려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엄니들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내가 옆에서 보살펴드려야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나는 소성리엄니들을 모시고, 서울로 인천으로 대구와 구미로 다녔다. 처음엔 엄청나게 바쁠까봐 걱정했지만 생각보다 소성리엄니들을 많이 불러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 각오에 비하면 너무 한량해서 좀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리고 평화장터, 소성리평화장터를 운영했다. 처음엔 약초언니네의 파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시작했다. 매일 품팔지 않고, 수요일과 토요일 집회시간만 점방문을 열고 장사를 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수익을 낼 수 있었고, 소성리사드철회성주주민대책위로 조직을 재편하면서 어려운 재정에 보탬이 되려고 노력했다. 8월말부터 시작한 평화장터가 오늘로 일곱 번의 투쟁기금을 전달하였으니, 에너지사용량에 비하면 상당히 큰 성과를 낸 듯 하다. 물론 노동력의 댓가를 지불하지 않고 평화모임 여성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일궈낸 성과다.
엄니들은 ‘민들레합창단’을 결성하고, 큰 무대로 공연을 몇 차례나 하게 되었을 때, 합창단 스텝들이 대거 움직여야했다. 그렇게 함께 모이고, 연습하고, 이동하고, 공연하면서 어느새 민들레합창단은 우리모두였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도 합창단 만들자는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사람들을 모았고, 음악감독과 반주자이면서 노래지도를 해주시는 분들과 함께 노래패‘소야’를 결성했다. 퓨전합창단이라고 하면서 장구를 치는 사람, 꽹과리를 치는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이곳에서 발휘활 수 있도록 했다. 매주 수요일이면 ‘민들레합창단’ 노래연습을 하고, 노래패‘소야’가 이어서 노래연습을 한다. 각각 부르는 노래는 다르다. 몇 번의 무대위의 공연을 통해서 자부심과 자신감이 생겼다. 더 멋진 무대를 만들고 싶은 욕심도 생겨서 지금은 신곡을 연습하고 있다.
소성리엄니들과 노래로 유기적인 결합을 하면서 정서적인 교감을 나눈다. 그리고 아주 끈끈해지고 있다. 민들레도 소야도 이제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간다. 엄니들은 노래연습할 때 행복한 표정이다. 그리고 열심히 하신다.
나는 소프라노를 맡았다. 내가 왜 소프라노인지는 음악감독이 정해주셨기에 더 할말이 없다.
글쓰기를 멈춘 두 달동안 참 많은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매일 새벽이면 공사인부 출입을 저지시키기 위한 활동이 진밭과 활기재에서 있었다. 원불교 교무님들의 기도로 시작하는 진밭지킴활동은 선요가로 몸을 풀고, 개신교 기도회 프로그램으로 진행한다. 진밭을 지키는 또 하나의 생명 ‘평화’는 어느새 성견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 손을 보기만 하면 핧고 물고 뜯는다. 나도 ‘평화’에게는 반가운 주인인지, 내 차가 주차를 하는 순간 ‘평화’는 반가운 몸짓으로 두발로 서서 나를 보고는 껑충껑충 뛰어댄다. 나는 매주 금요일 당번을 서기 위해 새벽일찍 진밭을 향하고 그날만큼은 ‘평화’와 맘껏 사랑을 나누려 한다.
아가였던 ‘평화’가 성견이 될 정도로 시간은 많이 흘렀다. 진밭의 지킴활동이 익숙해지고 정겨워진 시간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또 두 달 사이에 무슨일들이 있었나?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소성리는 오늘도 야간시위를 이어가고 있고, 소성리엄니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드를 반대한다. 소성리에 보상은 사드를 철회하는 것 뿐이라고,
올해는 사드뽑는 원년을 만들어보자고 구호를 외친다.
그 말을 딱히 믿는다기보단 우리의 소망을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려니, 얼마나 더 가야할 길인지 누구도 답할 수 없겠지.
그래서 ‘그래도 뚜벅뚜벅’이란 화담선생님의 글귀를 보는 순간 니의 심장이 멎을 거 같은 짜릿한 전율을 느꼈을지도 모를일이다.
우리 소처럼 뚜벅뚜벅 걸어가자는 약속을 이미 해왔건만.
그래도 뚜벅뚜벅
소성리엄니들의 발자국에 내 발자국 보태가며
그렇게 걸어가면 언젠가 우리의 구호도 현실이 되지 않을까?
사드뽑고 평화심자.
2018년2월10일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