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모찌
SO-SO 한 이야기 (3)
나는 가방모찌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진짜 가방모찌가 되었다. 처음에는 영화주연배우의 가방모찌로 시작해서 소성리엄니들의 가방모찌로.
박배일감독이 소성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얼핏 보긴 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영화로 탄생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영화는 어느 날 전자파를 타고 SNS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다고 했고, 상을 받았다고 했다. 마치 소성리의 깜짝 이벤트는 우리 모두에게 엔돌핀이 되어주었다. 단시간 찍은 영화에 뭐에 그리 큰 기대를 걸까만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상까지 받았다고 하니, 기왕에 꾸는 꿈 크고 야무지게 꿔보자고 나는 베니스국제영화제로 진출할 것이라고 점쳤고, 베니스로 갈 때 주연배우의 가방모찌로 따라나서겠다고 선방을 날렸다. 소성리의 붙박이가 된 김상패감독님은 가능성이 영 없는 건 아니라면서 슬쩍 정보를 흘리듯이 추임새를 넣어주었고, 소성리주민들과 연대자들의 들뜬 기운들이 후끈 달아올랐다. 급기야 베니스보다는 독일국제영화제가 유력하다는 예언이 등장하면서 가방모찌는 외국어를 해야 한다는 조언에서 독일어를 공부하라는 충고까지, 가방모찌를 뽑기위해 공개오디션 등장에, 며칠동안 영화로 울궈먹은 우리의 대화는 충분히 흥분되었다. 소성리 사드철회투쟁에 대한 희망과 자랑이 뒤섞인 날들이었다. 새롭게 다가올 미래를 흔쾌하게 맞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정작 영화 “소성리”의 주인공인 부녀회장님과 금연엄니는 이런 사실을 알고나 계셨을까? 소성리에서 야간시위할 때면 영화이야기로 시간을 보냈고, 이장님은 내게 부녀회장님 가방모찌를 하라고 명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베니스로 갈 때만 가방모찌를 하겠다고 값을 올리려고 밀당을 하기도 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소성리“를 본 후로 나는 마음을 단디 먹었다. 이 영화는 성공해야한다.
그 이후로 영화“소성리”가 서울 독립영화제에 출품되었다고 하고, 인천에서 공동체 상영이 잡혔다고 했다.
인천을 갈 때는 기차를 타고 가는 게 너무 멀게 느껴져 차를 운행하기로 했다. 그런데 운전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만하게 운전을 부탁할 사람도 없었지만, 가방모찌 한다고 해놓고, 다른 사람에게 운전을 부탁하는 게 너무 능력없어보였다. 은밀하게 사진가 진영에게 연락을 했다. 진영은 내게 “제가 도와드릴 일이 운전인가요?” 하고 물었고, 나는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끄덕이며 진영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진영은 서울에서 천안역까지 내려왔고, 나는 소성리서 천안역까지 운전해 교대했다. 그 꼴을 본 부녀회장님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모르지만, 그 멀리서 운전해 주러 오는 진영에게 감동한다. 나도 사실 그날 진영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눈물을 지었다. 농촌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고, 망가지고, 국가는 이들에게 어떤 존재이고, 한국사회 식민지분단의 역사가 현대에는 또 어떻게 재현되고 있는지, 소성리로 투영된 한국의 아픈 역사가 주민들의 일상으로 전달되는 영화는 슬프고 아팠다. 내 경험이 다 녹여있어서 그렇기도 했고, 반복되고 있는 침탈의 역사, 왜곡과 폭력으로 얼룩진 사건들에 목이 매인다.
당장은 그것이 자신의 현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먼 훗날, 이 자본주의사회에서 그 누구도, 파괴를 전제로 한 전쟁무기 장사로 이익을 남겨야하는 자본의 횡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날은 오리라고 본다.
매번 영화가 공동체상영될 때마다 주민과의 간담회가 잡히는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상영을 하는 사람들은 영화에 관한 관심도 크고, 소성리에 대한 관심도 높은 편이어서 주민과의 간담회를 하고 싶어 하셨다. 매번 부녀회장님과 금연엄니만 움직이면 피로하다고, 여러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움직이자고 의논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서 “성유보상”이 소성리주민들에게 주어졌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언론민주화운동을 하신 성유보님의 유지를 받들어 만들어진 상이라고 했다. 그동안에는 언론민주화에 기여한 언론인들이 주로 받았다는데, 소성리주민들에게 이 상이 결정된 이유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찾아든 언론사에 자신의 문제를 알리기 위해서 소성리주민들이 너무나 적극적으로 받아안고, 드러냈다는 것이다. 처음엔 상받으러가는 게 기분 좋은 일이었고, 상의 취지가 매우 의미 있었다. 마침 서울 가는 날에 맞춤한 듯 “CBS정관용 시사자키”에서 소성리주민들의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일타이피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 의기양양하게 서울로 나들이 가게 되었다.
부녀회장님과 경임엄니와 상돌엄니 그리고 나까지 네명이 비싼 KTX 차표를 상황실에서 끊어주는 대로 타고 올라가는 길에 말썽이 생긴다. 몇 번 일정이 바뀌면서 취소했다 새로 끊기를 반복하는 과정에 상황실에서 내게 취소한 차표를 보내준 모양이었다. 엄니들과 시간맞춰 도착한 열차에 올라서 좌석번호를 따라 열심히 걸었더니, 엉뚱한 자리였다. 7호차 좌석인데 1호차에 올랐으니, 완전 거꾸러 되돌아가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하필 산천호KTX는 기차가 뽀뽀하는 형태여서 1호차에서 7호까지 넘어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엄니들은 서서 가게 생겼고, 내 이마와 등줄기에는 땀이 삐죽삐죽 흐르고, 강교무님은 전화너머로 미안하다고 고개를 읊조리고 있는 듯 했다. 경임엄니나 상동엄니의 연세가 팔순인데, 대전까지 금세 도착한다고 해도 서서 가기엔 무리였을거다. 때마침 나이든 아저씨 한분이 간이좌석을 양보해주셔서 상돌엄니를 앉게 해드렸다. 옆을 둘러보니, 군복입고 휴가 나온 장병하나가 맞은편 간이좌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긴 했지만, 노인네를 계속 서있게 할 수 없어서 자는 군인을 깨웠다. 다행히 험한 사람은 아닌지, 잠결에 사정을 듣고는 벌떡 일어나 경임엄니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내가 다급해지니 그런 용기가 불쑥 불쑥 생겨나더라.
부녀회장님은 옆에서 “이런데 우리 노인네들만 보내놓으면 우리는 진짜 당황스러워서 아무것도 못할거야. 젊은 사람이 옆에 있어줘야지, 나도 이 어른들보다 젊다지만, 내 한 몸 챙기는 것도 힘든데 어른들 모시고 다니는거 무리야” 하시면서 나랑 오길 잘 했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옆에서 나도 좀 어깨가 으쓱 해지긴 했지만, 어른들 모시고 다니는 일은 늘 진땀빼는 일인건 어쩔 수 없었다.
대전역에 멈춰서 밖으로 나왔다. 1호차에서 7호차까지의 거리가 아득하다. 기차의 정차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거고, 내가 뛰어가니 엄니들이 뒤에서 뛴다. 나는 그게 더 마음이 쓰여서 뛸 수가 없었다. 엄니들께 천천히 걸어오시라고 하고, 내가 먼저 가서 기차를 잡아놓겠다고 하면서 뛰었다. 엄니들도 마음은 바쁘겠지만, 몸은 안 따라줄테니까 얼마나 답답했을까? 7호차까지 다 가서 올라타는 것은 무리여서 중간에 객실로 올랐다. KTX의 좁은 객실 사이로 사람과 커다란 트렁크에 부딪혀가면서 7호차까지 가는 길이 이역만리처럼 멀고 멀었다.
나는 오랜만에 KTX 낯설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지만, 무진장 불편한 서울 길을 가고 있었다. 그 불편한 서울행에 상돌엄니와 경임엄니는 한결같이 “우리는 괜찮에, 가자는 대로 따라가면 되고, 가다 힘들면 쉬다 가면 되고, 괜찮에 신경쓰지 말어” 하시면서 나를 편하게 대해주셔서 얼마나 송구스럽던지.
“CBS정관용 시사자키”에는 부녀회장님과 경임엄니가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인터뷰를 했다. 녹화라서 실수하면 다시 한다며 편하게 진행하자고 했다. 그런데 단 한번에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목소리가 허스키하고, 무뚝뚝하면서 짧고 담백한 경임엄니의 대답은 마치 추임새같기도 때론 단호했다. 부녀회장님과 아주 호흡이 딱딱 맞았다. 명쾌한 설명과 소성리의 입장을 부녀회장님이 잘 설명해주셨다면, 경임엄니가 마을의 입장은 단호하다는 것을 증명해주시는 듯 했다. 스튜디오 바깥에서 듣고 있노라니 감동이 밀려와서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안에서 말씀하시던 두 분의 눈에도 분명 눈물이 맺혔을거 같다.
“사드가 다 들어가고 나서 연대자들의 발길이 뜸한 건 사실이지만, 최근에 박배일 감독이 영화 소성리를 만들어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큐부문 상을 받았고, 공동체상영이 되고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소성리 사정을 알고는 찾아오시고, 방문하시면 또다시 연대자들의 발길이 늘어가고 있다” 라고 하셨다.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고, 앞을 나아갈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치고 있음을 부녀회장님이 메시지로 전했다. 인터뷰를 들으면서 ‘우리가 가는 길이 평화다’ 라는 제주생명평화대행진의 구호처럼, 우리가 가는 길이 평화가 되고, 사드를 뽑는 길이 될거란 희망을 놓을 수가 없을 거 같았다.
라디오인터뷰를 마치고 찾아간 민주언론상 “성유보상” 시상식장에는 민주언론인들의 책출판기념회가 한창이었고, 원로 언론인들이 대거 오셨다. 이 상이 어떤 상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올라왔더니, 아주 대단히 훌륭한 상이라는 것을 식장에 들어서 보니 느낌이 달랐다. 언론민주화를 위해서 희생되었던 수많은 저널리스트의 정신이 담긴 상을 소성리가 받다니 그것만으로도 신선했다. 엄니들은 작은 상패와 상금을 받아들었고, 조금 설명이 되지 않는 의아한 감 있었지만, 상을 선정했을 때의 이유가 분명히 있을테니 “성유보상”을 탄다는 것은 대단히 자긍심을 가질만 한 일이라고 보였다.
늦은밤에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 소성리에 도착한 시간은 12시가 넘어섰다. 그 시간까지 상받으러 올라간 우리를 기다려주는 동지가 있었다. 상타러 가서 기분좋고, 먼길 다녀온 우리가 고생한다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동지들이 난로에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로가에서 상장을 펴들고 우리끼리 시상식을 한다.
사드는 막아내지 못했지만, 우리는 사드보다 더 큰 동지를 만났고, 더 의미있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거라 확신했다.
2018년2월12일
저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