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비정규직!
우리는 소수로 남겨지고 싶지 않다.

#3 사람, 삶, 노동조합

by 시야

삶이 보이는 창 109 호/ 차헌호, 초희 공동작업

#3 사람, 삶, 노동조합

“노조를 만들었을 당시 연대를 가장 열심히 했던 곳이 KEC지회였어요. 야간근무 마치고 간부들만 온 게 아니라, 조합원들까지 와서 우리 노조 만든 거 공단에서 선전전 하려고 하면 KEC지회 조합원들이 같이 해줬어요. 우리도 야간근무해봐서 알잖아요. 야간 하고 아침에 또 자기 노조일도 아니고 남의 노조 만든다고 도와주러 온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잊을 수가 없지요.” 금속노조 가입이 안 되었던 초창기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이 노동조합을 만들 당시에 의지할 곳이라곤 KEC지회밖에 없었다. 돈도, 차도, 사무실도 물심양면으로 KEC지회의 자양분을 빨아먹으며 지금까지 왔다고 고백하자.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지회 노동자들이 정부청사 앞으로, 김앤장 법률사무소 앞으로, 서울 시내를 누비며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 문제와 노조 탄압을 알려내기 위해서 서울 상경을 결정했다. 서울 가는 길에 하룻밤 갑을오토텍 공장에서 머물려고 들렀다. 금속노조 소속의 갑을오토텍 지회는 100일 넘게 민주노조를 깨려는 못쓸 갑을 자본의 계략에 맞서 공장을 지키는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엔 회사 측이 사무직을 동원해서 공장을 가동하려고는 하지 않고 노조와 대치하면서 물리적 충돌을 유도하고 있어 노조는 긴장 상태에서 버티고 있다. 하루 종일 회사 측과 대치 중이라 저녁은 별 일정을 잡지 않아서 한가롭게 공장 한편에 똬리를 틀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막간을 이용해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지회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금까지 달려온 소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정태 씨는 노조 만들 때 차헌호 지회장을 차량 트렁크에 실어서 공 장안까지 데려다준 사람이다. 트렁크에 차헌호 지회장을 실을 때 겁나지 않았냐고 묻자 “겁날 건 없었어요. 그냥 뒷좌석에 앉아서 가자고 했는데 지회장님이 들어가다 검문에 걸리면 실패하니까 트렁크로 들어가겠다고 했죠. 그때까지는 별로 걱정도 없었고 아무 생각도 없었어요.” 노조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자마자 회사 측에 찍혀서 차헌호 지회장은 권고사직을 받고 해고되는 날까지 한 달 사이 엄청나게 글을 돌렸다. 매일 아주 짧고 단순한 글을 써서 여기저기 올려댔다. 타 부서에도 한두 명씩은 친한 사람이 있으니까 부탁해서 글을 올려달라고 했다. 소심한 사람은 SNS에 한두 번 올려주지만 조금만 적극적인 사람은 다섯 곳이나 여섯 곳까지도 마구 퍼 날라 주었다. 그러면서 소문을 냈다. 5월 29일에 노조를 띄울 거니까 같이 노조를 만들자고 말이다.

<왜 노동조합인가? 최저임금, 과도한 생산물량, 짧은 휴식시간, 식사 시간 20분, 조끼 입기 등의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일했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언제까지 관리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가. 더 이상 무시당하며 일하지 말자.

누군가 노동조합을 만들어주기를 바란다. 누군가 열악한 노동 조건을 바꿔주길 바란다. 답은 분명하다. 우리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 노동자가 단결해서 권리를 찾으라고 노동조합을 법으로 허용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로 뭉쳐서 노동조합을 설립하면 된다. 노동조합을 통해서 노동조건을 바꾸면 된다. 그것이 노동조합이다.>

-차헌호 씨가 노조를 만들기 위해서 현장에서 SNS로 퍼 나른 짧은 글

정태 씨가 야간근무하러 출근하는 길 밤 10시 40분경, 차 트렁크에 타고 현장으로 들어간 거다. 보여줘야 했다. 공장 안에서는 이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아해했지만 이번엔 노조를 만들어야겠다는 열기도 뜨거웠다. 5월 29일 노조를 띄우자고 했으니 28일엔 무조건 공장 안으로 들어가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그날 공장 안으로 들어가니까 현장에서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밤에 휴게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고, 모인 사람들은 노조를 띄운다는 것을 알고는 가입원서를 작성하려고 준비하고 있더라고요. 차헌호 지회장이 못 들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들어와서 놀랐다면서 현장에서 구호를 외치더라고요. 민주노조 건설하자고 외치는데 그때 그 구호 소리가 현장에 쩌렁쩌렁 울리니까 저도 모르게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렸어요.”

정태 씨의 기억으로는 구 회 외치는 목소리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다 같이 구호를 외치니까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란다. 그때 경비가 이걸 알고는 달려왔다. 예전 조직부장이 경비가 못 들어오게 저지하고 나선 거다. 시간을 벌어보려고 용기를 내서 막아서는 모습은 아직도 정태 씨의 눈에 선하다.

<조용하고 고요한 연못에 돌 하나를 던짐으로써 잔잔한 연못에 파동이 일어납니다. 노동조합이란 그런 것입니다. 현장에 불합리한 구조는 그냥 바뀌지 않습니다.>

- 차헌호 씨가 노조를 띄우기 위해 SNS로 퍼 나른 짧은 글

그렇게 5월 29일에 노동조합 깃발을 세웠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공장 문을 나선 노동자들의 얼굴엔 함박꽃이 활짝 피었다. 발걸음은 당찼다. 지난 6년 동안 공장에서 그들을 만나왔지만 그날만큼 그렇게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고 차헌호 지회장은 말했다. 노조 설립신고증도 구미시에서 이틀 걸릴 것을 ‘빨리 내놓으라고’ 드러누워서 하루 만에 받아냈다. 노조 설립이 되자마자 현장에 들어간 사람들이 노조 가입원서를 가져가 받아왔다. 휴게실에 노조 가입원서를 두고 작성하게 했다. 두 명이 다섯 명이 되고 다섯 명이 열두 명이 되었다.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노조 가입을 하게 되었다. 170명 중 수습기간 중인 신입사원과 정규직 연줄로 취업한 일부 사람을 빼면 138명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

노조 이름은 아사히글라스 비정규노동조합으로 출발했다가 이후 금속노조 가입이 승인되면서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지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조합원들에게 교육도 실시하고, 조합원들과 의논해서 요구안도 만들어 회사 측과 교섭도 시작했다. 조합원들의 요구는 소박하게 임금인상과 노조활동 보장으로 시작했다. 무엇보다 회사의 일방적인 행태를 이제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처음에 좀 놀란 듯했지만 이내 노조탄압 시나리오를 준비하기 위해서 ‘김앤장’을 모셔왔다. 본격적으로 노조와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회사가 전기공사를 한다며 하루 동안 공장 전체 휴무를 실시했다. 지금까지 일하면서 한 번도 공장 가동을 중단시켜본 적 없는 공장에서 하루 쉰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할 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 날 이후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지회는 휴가를 다녀와서 공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문자 한 통으로 해고 통보를 받고 거리에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저는 휴가 중입니다. 7월 1일부터 시작된 휴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아직 휴가 중입니다. 같이 휴가를 온 동지들이 지금은 많이 떠났지만 괜찮습니다. 아직도 휴가 중인 동지들이 남아있으니까요.”

상원 씨는 그 날의 휴가가 끝나면 현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투쟁을 시작하였다.

2015년 7월 1일부로 시작한 아사히글라스 공장 앞 천막농성은 구미시에 책임을 묻기 위해서 구 시청 앞에 천막 한 동을 더 쳐서 살림을 늘렸다. 부당노동행위, 부당해고라는 법률문제도 제기했다. 하청업체와 도급 계약을 해지했다는 것을 이유로 해 해고당했던 것이다. 원, 하청 도급계약 공정거래법 상의 문제도 제기했다. 매일같이 문자 해고의 부당성과 아사히글라스 노조 탄압을 알리기 위한 공단 구석구석의 선전전과 시민 서명을 받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을 것도 많다고 하지만, 해고돼서도 쉬는 날 없이 공장에 출근할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일찍 출근해야 했다.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지회 조합원들은 공장 다닐 때보다 더 부지런해지는 거 같다며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GTS에 들어오기 전에 정규직으로 일해 본 경험이 있었다. 내 개인 사정으로 그만두게 되고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봤을 때 정규직 일자리가 없었다. 비정규직밖에 없더라. 일을 하게 되면 언젠가는 잘린다는 것도 다 알고 있었고 이전에 두 번 정도 잘린 경험도 있다. 이제 나이도 들어가는데 계속 일자리를 옮겨 다니는 건 아닌 거 같다. 내가 모자라서 비정규직이 된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지금은 이러나저러나 한 번은 싸워야겠다고 생각 들었다. 내 바람은 다른 거 없다.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걸 꿈꾼다. 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행복하다.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

동주 씨는 노조를 시작하면서 율동 몸짓을 하게 되었고, 1년 4개월이 넘어서는 지금까지 전국의 각지에서 벌어지는 투쟁 현장의 무대에 올랐다. 몸짓 공연으로 연대활동을 한 것이다. 몸짓의 기량은 공연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점 올라가고 전문 역량을 갖춘 문화활동가 수준이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일곱 번이 바뀌는 동안 회사도 마냥 시간만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노조를 깨기 위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해가 바뀌는 동안 한솥밥을 먹고 새벽이슬 맞으며 ‘민주노조 사수하고 현장으로 돌아가자’고 굳게 약속했던 동지들이 돈 앞에 무릎 꿇어 떠나보내야 했다. 회사 측의 이간질과 회유, 협박에 떠나보내야 했다. 사람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회사 측의 탄압은 더 폭력적이고 더 악랄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공장 앞 천막농성장과 구미시청 천막농성장을 국가 공권력 경찰의 비호 아래 공무원과 용역을 동원해 순식간에 부셔버리고 철거하면서 4명이 연행되고 3명이 병원에 입원하는 극한 상황도 견뎌내야 했다. 그리고 다시 길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형님 아우 하면서 친했던 사람이 노조 간부 하면서 회사 측과 따로 만나서 술 마시면서 아사히 비정규 안 된다고 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 자리에서 너무 화가 났는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다혈질이라 내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노조 조직부장에게 알렸지요. 우리 싸움 안 된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었고, 처음에 시작할 때부터 물론 우리 집사람한테 좀 미안하지만 저는 끝까지 간다고 마음먹지 않았으면 처음부터 안 했을 거예요. 설사하다가 못 이긴다고 해도 우리 같이 고생했던 아사히 비정규지회가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고 다 같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몰라도 회사 측 관리자랑 술 마시면서 아사히 비정규지회 싸워도 소용없다고 말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떠나보낼 때 마음이 안 좋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 싸워야 하니까 뭐 어쩔 수 없죠. 아직도 한 번씩 연락 와선 안 되는 싸움을 왜 하냐고 자꾸 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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