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를 쓰다>
6월10일은 소성리로 열두번째 경찰침탈이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시각은 새벽1시다. 분노를 소성리에 내려놓지 못해서 지금도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화끈거린다. 오늘도 경찰버스가 50여대는 족히 소성리로 들어온 듯 했다. 병력은 1000여명 들어왔을거다. 늘 하던대로 하면 6시50분에 작전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작전은 조금 시간을 끄는 듯한 모습이었다.
집회를 시작하자 사복 입은 경찰, 직책이 있음직해보인다. 움직일 때마다 경찰들이 인사를 하는 모습이 그랬다.나이도 지긋해 보였는데, 우리집회 대오 앞, 도로 한가운데서 기저개를 펴고 스트레칭 하는 모습이 우리 할머니들 눈에 거슬렸다. “남의 염장 지를 일 있나 와 남의 마을 도로에서 우리 눈앞에서 저러고 있냐”고 원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성주경찰서 이동승서장이 직접 경찰병력의 줄을 세우고 위아래를 오락가락 거리면서 움직였다. 7시가 넘도록 경찰진압이 바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경찰의 경고방송, 알아 듣지도 못할 법조항을 나열해가면서, 마치 우리가 대단한 범법자라도 된 듯이 성주경찰서장의 위임을 받아 교통경비계장이 지껄여댔다. 자진해산 하지 않으면 무력을 행사해서 해산시키겠다는 협박을 방송으로 수시로 한 셈이다.
경찰들의 진압이 들어오는 시각에 내 옆에 앉은 점이가 언론기사를 찾아봤지만, 경찰병력이 소성리로 들어와서 충돌이 예상된다는 기사는 하나도 검색되지 않았다고 했다. 610민주항쟁 34주년이 되는 날 새벽이지만, 소성리는 민주화는 커녕 야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기사한줄,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 오늘 소성리에 사드기지로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서 경찰과 마찰을 빚은 기사는 없었다.
그렇다고 연대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숫자가 많지 않았지만, 진보당 부산, 울산, 경북 분들과 사회진보연대활동가들 그리고 울산의 여성회 분들이 새벽3시에 출발해서 소성리로 오셨다는 말씀은 가슴 뭉클했다.
계속 연일 자행되는 경찰들의 폭력진압으로 추행문제가 계속 회자되어서인지, 오늘 경찰들은 담요를 준비해 왔고, 진압 들어와서도 즉시 끌어내지 않는 걸로 보였지만, 내 뒤에서 사람들의 끌려나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오고 있었다. 내가 점이와 팔짱을 꼭 끼고 있을 때, 경찰들은 점이를 끌어내기 위해서 나를 떼어내려고 했는데, 내 뒤에 여경이 내 골반을 발인지 무릎팍인지 뭔가로 차는 느낌을 받았고, 순간 그의 손목을 잡고 왜 나를 차냐고 물었다. 허리가 불편해서 뒤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손목을 잡아서 그를 내 앞으로 끌어당길려고 했었다. 그러면서 점이는 떨어져서 경찰들에게 들려나갔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내게 손목이 잡힌 경찰이 양손으로 내 가슴을 꽉 조았다. 뒤에서 백허그하지 말라고 손을 쥐었지만, 경찰 여럿이 나를 들어 나르려고 했을 때, 남자경찰이 ‘허리’를 외치면서 마치 안전하게 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도, 내 가슴을 끌어안은 여경은 양 팔로 가슴을 꽉 조아서 나를 압박했고, 나는 숨쉬기 힘들다고 가슴에서 손 떼라고 소리를 질렀다.
여경들이 덩치는 작고 연약해 보일지 몰라도 훈련받은 유단자들이라서 손목의 힘이 야무지고, 여럿이 달려들어서 제압을 해버리기 때문에 내가 덩치가 크고 악다구니를 쓴다고 해도 그들을 이길 재간은 없다. 태령님이 백허그 당하면 숨을 못 쉬겠다고 한 말이 뭔지, 그게 사람을 제압하는 방법이었다는 걸 오늘 체험한 셈이다.
마지막까지 할머니들이 도로에서 나오지 않자 대화경찰이 달래고 얼랠 때, 어느 분이 ‘경찰서장이 엎어주면 나가겠다’고 하자 주변에 서 있던 성주경찰서장이 바로 할머니들 곁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장이 계속 시계를 훔쳐보는 모습을 보고는 련이 왜 시계를 쉴새없이 쳐다보냐고 핀잔을 주자 서장이 눈을 흘겨보더라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작전타임이 7시30분이니까 시간 전에 도로를 말끔히 비워야 했겠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을테지만, 할머니들이 쉽게 설득되지 않고 버티니까 변수가 발생한 게 아닐까.
결국 우리가 다 끌려들어와서 경찰들에게 감금상태로 놓이게 되자 도로는 뚫렸고, 7시39분에 트럭과 공사인부를 실은 승용차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용수, 길다란 트레일러 등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침 사드기지 건설저지 투쟁을 한차례하고 나서 마무리 집회를 했다. 어젯밤 늦게 부산신라대에서 밥연대를 하고 소성리로 달려와준 십시일반밥묵차 유희님과 기수님이 아침밥을 정성스레 준비해주셨다.
사드기지로 공사인부들이 들어가서 오후4시가 되면 작업을 마친다고 한다. 공사인부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면 경찰들의 임무도 끝나는 거라서 퇴근을 서두른다. 사드기지로 오후4시에 올라가던 평화행동은 경찰들에게 길이 가로막혀서 올라갈 수 없어서 개신교기도소와 소성리책방 앞 도로 건널목에서 오후평화행동을 한다.
도로를 점거하고 싸우기엔 소성리 마을에 남은 할머니 주민 몇몇 과 원불교교무님, 예수살기 장로님 그리고 몇 되지 않는 평화지킴이들 뿐이라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다만, 할머니들이 건널목으로 길을 건넜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공사차량이나 경찰버스가 통행하는 데 불편을 주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경찰들도 소성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형편을 잘 파악하고 있을테니 별 긴장을 느끼지 못하는 듯 하고, 대화경찰 여럿이 할머니들을 에워싸고는 도로를 건널 때마다, 버스를 보내기 위해서 몸으로 가로막고, 길을 터주고,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suv차량에 ‘출입허가차량’이란 표지판이 붙어있는 공사인부를 태운 차량이 내려왔다. 소성리부녀회장님이 소성리 마을도로로 공사인부들 다니지 말라고 항의하면서 차량을 막았고, 경찰이 에워싸서 부녀회장님을 끌어내려고 하자, 부녀회장님은 도로에 드러누웠다. 페이스북라이브를 찍던 형선교무님이 공사인부를 태운 차량에 소성리도로를 이용하지 말라고 항의하자, 남자경찰이 제지하려고 들었고, 서장의 껌딱지(비서)가 나타나서는 “여제 나와”라고 하더니 여경들을 앞세워서 “밀어내”라고 지시했고, 형선교무와 나를 길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나는 카메라로 촬영하고 있는 중이었고, 여경들은 몸으로 우리를 밀어내면서 손으로 카메라를 치우라는 듯이 쳤다. 왜 카메라를 치냐는 내 항의를 하는데, 대화경찰이란 자가 끼어들어 나를 말렸고, 여경들 뒤에 내 허벅다리에 앉았던 단발머리 여경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나는 ‘당신 나한테 사과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따졌다. 허벅다리에 주저앉은 여경도 내 카메라를 친 여경도 어디로 갔는지 뒤로 사라져버렸고, 대화경찰이 나를 붙잡고는 참아라고 한다.
참 말이 쉬워 참으라는 거지, 가해자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참으라고만 하는 경찰이, 최소한 경찰복 입고 할 말은 아니지 않은가. 어처구니 없는 일이 하루이틀 있어온 건 아니지만,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안 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한쪽 가장자리에 몰려서 갇혔고, 교무님과 장로님은 건너편에서 또 경찰들에게 가로막혀 있었는데, 원래 사드기지로 드나드는 차량들은 소성리마을로 다닐 수 없다는 것이 그간의 암묵적인 합의였었는데, 경찰병력 동원해서 아침 저녁으로 마음대로 이용할려고 하니까 당연히 우리 입장에선 마을도로를 함부러 이용하지 말라고 항의할 수 밖에 없는 거 아닌가.
소성리는 시작도 끝도 아닌 진행형이다.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는 진행형이다. 한국정부는 올해 말까지 공사를 할거란 이야기를 흘리고 있다. 그러면 올 한해 동안 경찰병력을 동원해서 소성리를 짓밟고 사드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차곡차곡 밟아나가겠다는 의미다.
할머니들은 점점 늙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