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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Jul 18. 2021

할머니가 구미공단을 찾아간 날,

<소성리를 쓰다>

코로나19 감염병 유행이 본격화되면서, 소성리에서 늘상 있어 왔던 수요집회가 멈췄고, 토요일 밤마다 즐겼던 촛불문화제도 중단되었다. 마을회관을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연대자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나도 자연스럽게 소성리로 올라가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내 딸이 아팠다. 그러고 나서 연대투쟁도 예전만큼 활발하게 다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들은 또 한 살 나이를 잡수셨고, 한 해 한 해 기력이 달라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느 날 문득 할머니들을 모시고 밖으로 다니는 게 불안해졌다. 코로나19 감염병도 걱정이었지만, 연로한 할머니들이 먼거리를 다녀와서 오는 피로감이 예전과 다를 걸 생각하니까, 이젠 어디 가자는 말을 꺼내면 안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사히 수요투쟁문화제를 갈 때도, 부산신라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문화제 때도 할머니들에게 가보자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드철회성주대책위 이종희위원장님이 아사히비정규직 투쟁 6주년 결의대회에서 연대발언을 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 부녀회장님은 같이 가봐야겠다며 할머니들한테 무리하지 말고 갈 수 있는 분만 가자고 했는데, 상돌할머니는 아직 몸살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집에서 쉴란다고 했다. 경임할머니는 “가야지” 한마디로 의사를 밝혔고, 금연할머니도 “당연히 가야지” 하셨다. 그리고 그날 밤 난로가에서 모인 마을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눠서 구판장 이옥남사장님이 가겠다고 한 거 같고, 짱돌과 소야훈님이 그리고 원불교의 교무님들이 가기로 했던 모양이다. 

우리 평화절박단도 잠시 연극연습이 중단된 상태라서 오랜만에 구미공단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아사히글라스 공장이 있는 구미공단으로 갔더니 소성리의 주민과 함께 지금까지 동고동락하면서 평화를 지켜온 소성리평화지킴이들이 사드반대라인을 만들었다. 이종희위원장님의 연설은 결의대회가 시작되고 두 번째 순서였고, 나는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장소에서 위원장님이 발언하는 모습을 남겨두고 싶은데, 촬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선택해야 할 때가 아니라 미리 준비했어야 할 시점에 갈팡질팡 하다가 뒤늦게 차에 쫓아가서 카메라를 챙겨나왔다. 카메라를 들고 집회장소로 오고 있을 때 위원장님은 말씀을 시작하셨고, 나는 제일 뒷 자리에서 저 멀리 단상위에 선 위원장님의 모습을 담았다. 

물론 잘 담을 리가 없겠지만,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왜 그 선택의 순간에는 명료하지 못 한건지, 선택의 기로에 서면 후회는 그림자처럼 뒤따라 온다. 내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들을지에 대해서 생각해 놓지 않으면 무엇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데, 생각이 자꾸만 뚝뚝 끊긴다. 그리고 이어지지 않는다. 

단상에서 내려온 이종희위원장님 곁으로 갔다. 위원장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었고, 내려오자 마자 담배를 피웠다. 나는 위원장님께 떨리지 않냐고 물었고, 위원장님은 5000명도 안되는데 뭐가 떨리냐고 대답했다. 아.. 맞다. 몇 만 명 모인 서울광화문에서 연설했던 분이었지. 

깜빡 잊고 있었다.      

차헌호지회장으로부터 연설 제안을 받고 핸드폰에 이것저것 껄적여보았다면서 보여주셨다.  온통 현대정치 이야기다. 사드반대투쟁을 시작하면서 성주촛불이 분열될 때 왕년에 운동권이었고, 지금도 운동권으로 통하는 사람들이 소성리에 등을 돌렸을 때, 기꺼이 소성리로 올라와서 앞장선 분이다. 원래 농부가 아니었다. 대구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CEO인데 정년퇴직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소실적에 양심적인 회사경영을 해왔다고 자부하는 분이기도 하다. 그러다 사드반대 투쟁하면서 소성리로 찾아온 수많은 노동자들을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자신이 상식이라 믿었던 것이 통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을 사드반대 투쟁을 하면서 경험하였다. 아마 아사히비정규직지회 투쟁 6주년 결의대회에서 그 많은 부당하고 억울한 사연들을 눈으로 보게 되지 않았을까.      

할머니들에게 카메라의 눈을 옮겨갔다. 금연할머니는 ‘노동자들이 불쌍하다. 매일 길거리에서 싸워야 하니까, 그렇지만 여기는 우리처럼 경찰들이 없어서 다행이다.’ 고 하신다. 집회장소에 경찰은 교통경찰 뿐이었다. 경찰들이 없는 건 아닐테고 아마 공장안에 들어가 있지 않을까. 금연할머니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한참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옆에 태령님과 짱돌님이 대화하는 모습으로 바라본 공단의 하늘이 너무 맑고 푸르러서 한편의 그림같았다. 아사히글라스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았다. 굴뚝 위의 하늘이 영롱하다. 연기가 없으면 이렇게 맑은 하늘을 공단에서도 만날 수 있구나.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애정을 듬뿍 담아 모인 만큼 반응도 뜨겁다. 자리는 지키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러 온거지. 그래서인지 사람을 만나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그 사이에 나는 카메라를 들고 비집고 염치도 없이 앞으로 전진했다. 조신 조신 다녀야 하는데, 유별나게 다닌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살금살금 다니다가, 아사히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의 긴장하고, 흥분하고 있는 표정을 담았다.      

소성리부녀회장님과 할머니들은 부러워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도, 젊고 건장한 사람들이 모이면 소성리 마을길을 미군에게 내어주지 않기 위해서 단 몇 분이라도 버텨볼 수 있을텐데 하는 부러움도 있겠지만, 그보다 연대로 모인 사람들 그 자체가 부러운거지.      

궁금했다. 소성리할머니에게 연대란 어떤 의미였을까. 우리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연대라고 단정지을 수도 있겠지만, 연대라는 말을 꼭 쓰지 않아도 어렵고 힘든 곳에 찾아가서 눈물을 짓는 마음이 무엇일지, 할머니들의 마음에 어떤 측은지심이 있는지 듣고 싶었다. 할머니는 한마디로 “불쌍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마 그 단어 말고는 더 많은 어휘를 써서 자신의 마음을 설명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을테니까. 그 한마디가 할머니의 마음을 전부 다 표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성리할머니의 마음을 조금 더 언어화 해보고 싶다. 무엇이 할머니들에게 측은지심으로 눈물짓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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