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의 별고을 촛불이야기
이글은 성주의 글쓰기 모임인 ‘다정(多情)’ 회원들이 성주의 사드배치 반대투쟁을 직접 체험하며 느낀 소감을 쓴 것입니다.
[삶이 보이는 창 109호] 에 실렸습니다.
처음 촛불 들던 날
11월 4일, 나는 공허하다. 몸이 아파 힘들다. 대변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투쟁했던 그때가 가끔은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서슬이 퍼렇게 날이 선 회의가 매일 열리고 무엇과 싸우는 지도 모르게 서로를 견제하고 비판했던 7월과 8월이 그립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아무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미안한 마음이 크다.
7월11일. 내 카카오스토리에는 “그냥 넘어 갈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저희들도 대책을 세워야할 것 같네요”라고 쓰여 있다. 사드 배치 후보지로 성주가 떠오르고 있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그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날 모두가 그랬듯 성주 사드 배치는 꿈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7월 13일 사드 배치 최적지가 성주 성산포대라는 놀라운 발표를 듣고 성밖숲에 모여 궐기대회를 했다. 사드배치 궐기대회가 열리는 동안 아무렇지 않게 차들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무엇을 하긴 해야겠는데 할 수 있는 게 없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부터 알 길이 없으니 막막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로컬 푸드 직거래 카카오톡에서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엄마들과 이야기 나누며 서로를 위로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몇 명이 될지 모르지만 군청에서 만나 얼굴을 마주보며 인사도 하고 촛불도 켜자는 의견이 단체 카톡방에 올라왔다. 저녁 7시 군청 로비에서 15명 정도의 엄마들을 만났다. 서로 자기 소개를 하며 어색함을 덜었다. 이야기가 시작되니 어느새 같은 마음이 되어갔다. 시간이 지나자 한두 명씩 군청 마당에 신문을 깔고 초를 켜기 시작했다. 어둠이 깊어질 무렵에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촛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렇게 촛불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7월 14일, 여기 성주 땅엔 우리들의 아이들이 숨 쉬며 살고 있음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네이버 밴드에 아이들을 등교 거부시키고 가두 행렬을 하자고 글을 올렸다. 어린 조카가 몇 달 전부터 나에게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내 동생은 1학년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1인 시위에 나갔다. 나는 공방에서 4살 조카의 케이크를 만들어 어린이집으로 가져갔다. 좋아하며 달려오는 조카와 또래의 아이들을 보니 참으려 했던 눈물이 또 터지고 말았다. ‘저 아이들을 지켜내지 못하면 안 된다. 죽는 한이 있어도 꼭 사드를 막아내야 한다’는 다짐을 하니 용기가 솟아올랐다.
나는 군청으로 달려갔다. 뜨거운 태양이 나를 구워삶는다고 해도 나는 괜찮을 것 같았다.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등교 거부 추진하고 있다고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고 응원의 메시지가 왔다. 물이며 음료수는 물론, 간식거리도 사다 주셨다. 덥다고 모자를 씌워주시고 얼려 오신 수건을 목에 걸어주셨다. 성주 사람들은 그런 분들이었고 지금도 그런 분들이다. 많은 언론들과 인터뷰를 했다. 높으신 분들이 단식하고 있는 군수를 만나러 왔다고 하여 달려가서 무릎을 꿇고 살려 달라 애원도 하였다.
큰딸이 엄마가 힘들게 시위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조퇴를 하고 내 옆에 와있기도 했다. 딸을 보니 감정이 더 북받쳤다. 그냥 살던 대로 그냥 그렇게 우리들이 누려왔던 행복 속에 살게 해 달라고, 제발 살려 달라고, 울고 또 울었다. 그런 날들을 생각하니 지금 또 눈물이 난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간절하고 애절했던 마음이었다. 7월 13일과 14일, 사드 배치 발표가 난 이후 이틀은 피가 마르고 애가 타는 하루였다.
7월 15일에는 총리와 국방부장관이 온다고 했다. 성주 주민 대표 가운데 엄마의 마음으로 질문을 준비해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리고 성산포대에도 방문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국방부가 거짓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하고 주민간담회와 설명회를 했다고 언론에 발표한 후에, 사드를 바로 배치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밤잠을 설쳤다. 괴로움이 깊으니 질문은 잘 써지질 않았다. 등교 거부가 초중고 할 것 없이 잘 진행되어가고 있는 듯 했는데, 7월 15일에 황교안 총리와 한민구 국방부장관이 온다는 얘기에 교육부가 손을 썼는지, 학교는 등교 거부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학교운영위원장들과 학부모회 임원들이 학교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고서야 외출과 조퇴 허가를 받아서 아이들이 군청 마당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인구가 적다는 이유로 사드 배치가 결정된 성주에도 장차 이 나라의 일꾼이 될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들을 이용한다는 말도 있겠지만, 그래도 성주가 아이들의 고향이며 삶의 터전이기에 불의에 맞서는 법을 배우는 것이 등교하는 것보다 더 큰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해답도 내놓지 못하는 총리와 국방부장관이 왔다. 나는 힘없이 앉아서 질의응답 시간이 오지 않기를 기도드리고 있었다. 황교안 총리가 입을 여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분노 게이지는 타들어가는 날씨를 뛰어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내 물병은 내 손을 떠나 공중을 날고 있었다.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 광장을 보며 나는 속으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소리 없는 외침이 내 안에서 올라왔다.
전화가 울려서 받으니 옛 경찰서 주차장에 주민 대표들이 타는 차가 있으니 거기에 타고 있으라고 했다. 거기에서 나는 차가 출발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황 총리가 탄 차량은 6시간 동안 ‘셀프 감금’ 상태가 되었다. 다행히 내 기도는 이루어진 셈이다. 스펙터클한 그날을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법 없이도 사는 순한 농부들을, 엄마들을, 아빠들을 왜 분노에 차게 했는가. 진심이 없는 말을 하는 그 입을 막으려는 사람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우리 군민들은 침착하게 분노를 다스렸다.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너무나 장한 하루였다.
7월 18일. ‘더불어민주당’의 박주민 의원님과 함께 ‘공공기관의 갈등 예방 및 해결에 관한 법률 입법 공청회’에 사례 발표를 하러 국회에 가게 되었다. 내가 ‘성주 사드배치반대 투쟁위’ 대변인으로 처음 공식적인 자리에 서게 된 날이다. 제주 강정마을, 밀양 송전탑, 제주 신공항 등 오랫동안 힘겹게 싸워온 분들 앞에서 6일 동안 투쟁한 우리의 이야기를 울먹이며 읽었다. 갈 길이 멀고 답이 없는 길을 가야하는 우리 성주가 안타깝고 안타까웠다. 7월의 나는 감정에 휩싸인 여자였던 것 같다. 건드리기만 하면, 말만 하면 눈물이 쏟아졌다.
이렇게 감정적인 내가 대변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지만 이성적이고 차분한 박수규 선생님과 함께 일하게 되어서 박수규 선생님을 옆에서 지켜보며 참을성과 침착함을 배웠다. 거의 매일 회의에 나갔으며 내 일상은 1인시위 시작과 동시에 멈추어 버렸다. 나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는다는 것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미안했다. 나만의 평화로운 일상을 산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케이크를 만든 뒤에 치우지 못한 설거지와 쓰레기들은 한 달이 넘어서야 해결을 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은 날이,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은 날이 수없이 지나갔다. 날이 선 회의에서는 말하고 싶어도 참았다. 기가 차서 하지 못했던 말들을 집에 와서 혼잣말로 다스렸다.
브리핑 자료를 정리해서 가면 선생님이 오케이, 하셔도 노 단장이 오케이 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공동위원장 중 한 명에겐 꼭 오케이를 받아야 촛불에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매일이 떨렸고 두려웠으며 힘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것이 많았다. 내 머리와 내 마음에서 하는 말이 아닐 때도 많았다. 내가 썼지만 내 말이 아니고 모두의 의견을 반영한 보도자료여서 어떻게 읽어야하나 고민이 되었다. 읽어보고 또 읽어 보았지만 입에 잘 붙지 않았다. 나의 그런 어색함을 성주 사람들도 알아보았는지 어느 날 카카오톡 단체방인 ‘1318방’에서 나의 옷차림과 말솜씨에 대해 질타가 올라왔다. 참으로 마음이 아팠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수백 명 어느 날은 수천 명 그리고 팩트TV 등 카메라가 있는 앞에서 말하는 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에요”하며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그냥 두었다.
그런 시간들이 많이 힘들었지만 혼자 삭히고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멋진 분들이 촛불에 나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매일 매일의 감동이었다. 좋은 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행운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군수가 제3부지를 발표한 날 나는 내가 아니었다. 입에서는 욕이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성은 완전히 백지가 되어버렸다. 주민을 막으려고 서있는 공무원들과 사복경찰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애원하는 이재동 님과 끌려나오는 배현무 님과 손소희 님. 군수의 제3부지 발표는 무효이며 사드 배치 철회되는 날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소리 높여 외쳤지만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냥 힘없는 아줌마인 것이, 돈 없고 빽 없는 초라한 사람인 것이 어찌나 서럽던지. 난 왜 이리 없는 게 이리도 많은지. 군수가 그럴 것이라 예상하고 알고는 있었지만, 그날은 나에겐 죽을 것 같이 아픈 날이고 힘이 다 빠져버린 날이었다. 그러나 성주의 촛불은 지금 꺼질 줄 모른다. 나는 지금껏 그 힘을 믿고 살아간다.
‘다정(多情)’ 회원 배은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