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든 남자.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들꽃, 공단에 피다>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우린 같이 글쓰기 모임을 했더랬다. 나는 그야말로 페북에나 하고 싶은 말, 뱉고 싶은 말을 긁적거렸지, 제대로 된 글을 써본 적이 없었던 때인데, 어느날 차헌호가 내게 글 한편 쓰라고 연락이 왔었다. 잡지 삶창에서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그는 서울로 공동투쟁을 하러 올라갔다 내려왔다 바쁘기 시작할 때였었다. 원고지 120매 분량이라고 해서 A4용지로 계산해보니까 제법 분량이 많았다. 나 혼자 무슨 수로 쓰냐고 같이 쓰자고 했었는데 그때 마침 아사히비정규직지회가 김앤장을 혼내주겠다고 서울로 가서 김앤장 사무실을 찾아갔던 때였다. 하루는 내가 김앤장에서 어떻게 하더냐고 물었더니, 차헌호가 하는 말이 김앤장에 간판이 없어 어찌어찌해 찾아갔더니 현관 입구에서부터 경비아저씨가 자꾸 길을 가로막고 누굴 찾아왔냐고 묻더란다. 나이든 경비아저씨도 계셨지만, 김앤장 사무실에서 젊고 덩치 큰 험상궂게 생긴 경비들도 내려보냈었나보다. 이들이 현관입구에서부터 차헌호 일행의 길을 가로막고 누굴 찾아왔냐고 물으니, 차헌호가 마땅히 생각나는 이름은 없고, 법률 사무소에 김씨하고 장씨 찾으러 왔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경비가 자기가 김씨라고 하고 그 옆에서 장씨라고 하면서 도대체 김씨, 장씨 누구를 찾아왔는지 대라고 괴롭혔단다.
그때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웃기던지 배꼽이 빠질듯이 웃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를 한꼭지 써보라고 했었다. 정말 차헌호는 그 이야기를 한편 썼었다. 그런데 김앤장을 만나러 갔던 서울길이 순탄할리가 없었고, 그 앞에서 투쟁문화제 한번 하려니 경찰들의 등살에 얼마나 고달팠을지 나는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재작년이었다. 스튜디오알이 아사히비정규직지회 8주년에 맞춰 영상을 하나 제작했었고, 거기에 우리밥연대 김주휘 동지의 인터뷰하는 모습이 나왔다. 처음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만났던 곳이 김앤장 앞이었다고 했다. 거기서 피켓팅을 하고 선전전을 하기 위해 김앤장을 호위하는 경찰들의 방해를 뚫고 하루가 멀다하며 싸웠고 문화제를 할 때마다 경찰병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던 노동자들이 치열하게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김주휘 동지가 그때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처음 만났던 모습을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었구나. 그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을지 나는 몰랐었다. 그래서 그가 들려준 김씨와 장씨를 찾던 어리숙한 구미촌사람들의 서울나들이 쯤으로 엄중한 사안을 희화시킨 것이었다. 그래서 차헌호의 글은 뭔가 엄중할 것 같은데 코믹한 약간 톤조절이 안되는 글이 되었던가 싶었다. 웃기는 장면인데 왜 이렇게 장엄한 느낌이 들까 싶은?
아무튼 지금 와서 그 글을 다시 읽으면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서울가서 김씨 찾고 장씨 찾았던 건 정말 재미있었다. 그 놈들을 찾기 위해 노숙하며 경찰폭력에 시달려야 했겠지만, 재미가 어디 그저 얻어지나? 투쟁이 엄숙하기만 하면 무슨 재미로 긴 시간을 버티나. 그러니 재미난 일도 자주 있어야지.
하지만 그런 재미난 이야기도 의미있게 잘 써두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막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