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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May 11. 2016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들에 대하여

#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작가 김훈은 에세이집 <밥벌이의 지겨움>의 서문에 '입을 벌려 지껄일 필요는 전혀 없을' 것에 대하여 썼다고 했다. 일기는 일기장에 쓰면 될 터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자서전을 내고 여행기를 쓰고 에세이집을 출간한다. 대개가 '지껄일' 필요가 없는 말들이다. 아마 글을 쓰는 그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굳이, 내어 놓는다.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내가 뱉어내는 언어들은 때로 너무 비장하다. 목적과 대상이 뚜렷하여 직선으로 날아가 정곡에 꽂히는 것이 우선이다. 어지러운 말은 다른 말들과 어울리지 못할뿐더러 주변에 피해가 가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꼭 해야만 하는 말을 날카롭게 갈아 시위에 메겨 당기는 일은 몹시 피곤한 일이다. 그 피로 탓에 다른 언어들은 제 안에서 소멸될 때가 많다. 그런 하루가 쌓여 벼리다 만 언어들만 드문드문 남아있는 내 삶이 눈물겹다.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글을 쓰는 것은 그래서 더욱 힘들다. 일단 필요하지 않은 언어 중에 기필코 하고 싶은 말을 고르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른다고 해도 내가 이 말을 꼭 해야 하나 하는 자의식이 제동을 걸기 일쑤다. 이쯤 되면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지껄임’들은 어찌 된 영문인가 싶다.


그런데 지금,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이렇게 지껄이고 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기에 내가 뱉어놓는 이 언어들은 스스로 욕망한다.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지만 스스로 욕망하기에,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지만 목표와 대상이 없기에, 메인 데 없이 자유분방하고 시위 없이도 멀리 난다. 뾰족하게 깎아내기보다 찰흙을 빚어 자기를 굽듯이 덧붙인다. 한편 힘겨우면서도 마음 언저리가 뭉클하다.


이러한 언어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서는 우선 잘 달래야 한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려면, 아무도 듣지 않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은 물론 의미 있는 일이지만, 그것이 과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생동하는 언어를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점토는 덧붙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쓰지 않아도 될 글을 굳이 쓴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값지다. 누군가가 필요로 하지 않지만 스스로 욕망하는 언어를 용기 내어 읊조리는 것은 세상 앞에, 삶 앞에 치열하게 맞서겠다는 다짐이다. 효용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이 사회의 강박을 의연히 거부하겠다는 맹세다. 앞으로도 절대 읽을 일 없는(그들은 이미 각오가 되어 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다) 수많은 자서전이, 여행기가, 에세이집이 정겹다.


김훈은 스스로 '지껄일수록 가난해졌으니 불쌍'하다고 썼으나, '지껄이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 수 없었을 거라 믿는다. 나도 그처럼 '말할 수 있는 것들, 말하여질 수 있는 것들의 한계 안에서만 겨우 말하려' 한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일지라도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기에 용기 내어 쓰고자 한다. 그것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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