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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May 11. 2016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긍정과 부정

꽃을 꺾어 든다. 꽃잎을 한 장, 한 장 뜯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계절을 만나 꽃은 피고, 꽃이 피어나듯 사랑도 싹튼다.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는 사랑이란 감정을 소녀는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소녀는 꽃을 꺾어 든다. 꽃잎을 뜯을 때마다 희비가 부침한다. 꽃잎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소녀는 기도하듯 되뇐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만물이 생의 기운을 뽐내는 봄에 나는 문득 사는 것이 아득하다. 이름 모를 꽃은 만개하여 지나가는 모든 이의 마음을 훔치고 봄 처녀들의 치맛자락은 아름답게 찰랑거리는데, 찬란한 계절을 만나 피어나는 생명 앞에 나의 삶이란 어찌 이리도 누추하단 말인가. 사는 것이 아득할 때, 나는 숫제 소녀처럼 꽃이라도 꺾어 들고 싶다. 애꿎은 꽃에게라도 물어야겠다.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


매일 아침 7시에 빨간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가, 저녁 9시가 되면 다시 빨간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빨간 버스가 잇는 두 공간의 거리는 아득하다. 아득한 두 공간의 경계를 나는 헤아릴 길이 없다. 두 공간을 오가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꽃은 피고 치맛자락은 살랑거리는데, 두 공간의 아득함 만큼 나의 삶도 아득하다. 나는, 잘 하고 있지 못한 걸까.


어느 청아한 아침에는 잘 살고 있다 싶다가도 어느 눅눅한 저녁에는 내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싶다. 나의 존재는 아침과 저녁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자전이 내 삶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럼에도 나는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한없이 부침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꽃이 피고 지듯 오르락내리락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봄을 만나 눈부신 생명이 겨울 동안 숨죽이고, 조용히 혹한을 견뎌낸 생명이 춘풍에 다시 생동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삶은 여전히 아득하다. 꽃을 꺾어 꽃잎을 뜯을 게 아니라, 머리에 꽂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사실 잘하고 있다와 잘하고 있지 못하다 사이의 거리는 멀지 않다. 그 차이는 꽃잎 한 장 정도이다. 마지막 꽃잎이 남았을 때 사랑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한다라고 말하면 그뿐이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묻는 대신 잘하고 있다 여기면 그 뿐이다. 꽃잎이 다 떨어졌다고 하여 사랑이 끝나는 것은 아닐 테다. 잘하고 있든 잘하고 있지 못하든 삶은 계속되고, 찬란한 생의 기운 앞에 계속 누추할 것이다.


소녀에게 꽃잎이나 뜯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가서 사랑을 쟁취해보면 어떻겠냐며 현실적인 조언을 해줄 수도 있다. 헤아릴 길이 없는 사랑 앞에 그 말은 풀 뜯는 소리나 다름없다. 소녀는 꽃잎을 뜯으며 사랑이란 감정을 배운다. 아지랑이 같던 사랑은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필 때쯤이면 작열하는 태양처럼 분명해질 것이다.


아득한 삶에 대한 긍정도, 어느 봄날 꽃피는 소리와 함께 처녀의 치맛자락이 살랑거리며 일으키는 바람을 타고, 그렇게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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