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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담 May 12. 2016

오지선다의 추억

#심보선 #불평등

나는 학창 시절 오지선다형 문제를 푸는 것을 즐겼다. 특별히 배움에 대한 욕망이랄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 따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놓여있는 다섯 개의 답안 중 올바른 것 혹은 올바르지 않은 것 하나를 골라내는 것이 재미있었을 뿐이다. 그것은 곧 학교에서 모범생이 되는 지름길이나 다름없었다.


다섯 개의 문이 나있는 작은 공간에서 남들과는 다른 별난 것을 골라내기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늘 세 개 정도는 빤히 보이는 오답이어서, 번호에다 빗금을 그어놓고 나면 양자택일만 하면 되었다. 내가 해야 하는 고민이란 그 정도였고, 짧은 망설임 끝에 5번 문을 두드리면 그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빨간 동그라미가 문을 열어주었다.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명료한 세계인가. 그때는 그렇게 답이 있었다. 오지선다의 세상에서는 옳음과 그름이 뚜렷했고, 원리와 원칙이 있었으며, 불의 대신 정의가 승리했다. 사회에도 윤리에도 역사에도 정답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무수한 질문들의 답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왜 정권의 실세들은 반드시 비리를 저지르는 것인가, 왜 부정 축재한 죄인들은 여전히 잘 먹고 잘 사는 것인가, 왜 민주화 열사들보다 권력의 개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인가, 왜 독립운동가의 자손들 대신 친일파의 자손들이 이 나라의 지배층인 것인가. 부도덕한 사람들이 권력을 얻는 것인가, 권력을 갖게 되면 부도덕하게 되는 것인가, 권력을 악용하여 돈을 많이 벌면 그렇게 좋나, 돈을 많이 벌면 다른 사람의 아픔은 중요하지 않은 걸까, 권력과 돈이 있으면 체면과 염치는 필요하지 않은 걸까. 나는 돈도 권력도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들을 비난해도 되는가, 나는 돈과 권력이 싫은가, 나 혼자 그들을 비난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뀔까,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평등이란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하는 자들과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자들의 차이다

- 심보선, <집>,《눈앞에 없는 사람》


삶이 던지는 질문에는 너무나 많은 문이 나있다. 문이 너무 많아서 문이 아예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까스로 문을 열고 나간다 해도 친절하게 악수를 건네는 빨간 동그라미 따위는 없을 것이다. 오지선다의 단순 명료함은 기만이자, 차라리 이상향이다. 나의 어리석음에 몸서리치는 한편, 그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하는 까닭이다. 정해진 원리와 원칙이 지켜진다면 아마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고도 수많은 문에 빗금을 긋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무수한 질문을 던지지만 제대로 된 답 하나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질문 하나 던지지 않지만 무수한 답을 소유한 사람들은 많은 것 같다. 그들은 대체로 잘 먹고 잘 산다. 그게 문제다. 혹시 나의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것은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못해서인가. 대체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아니면 숫제 질문을 던지지 말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도 아직은 답을 구하지 못하겠다. 삶의 모범생이 되긴 영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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